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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을 슬퍼하여 꽃도 눈물 흘리고 - 요시카와 고지로의 두보 강의
요시카와 고지로 지음, 박종우 외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9년 5월
평점 :
책은 <두보의 시론과 시 - 교토 대학 문학부 고별강의>와 <두보사기杜甫私記>로 되어 있으나 일단은 전자만을 읽음. 이 글은 1967년 2월 1일에 있었던, 교토 대학 문학부 교수로 재직하였던 선생의 정년 퇴임 기념 강의를 글로 옮긴 것이다. 저자인 요시카와 고지로 선생에 대한 존경의 염(念)으로, 가르침을 받는 기분으로 읽었다.
1.
강의의 주제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두보는 어떠한 이론을 가지고 시를 지었는가, 다시 말해 어떠한 자각을 바탕으로 시를 지었는가 하는 문제”(p.12), 즉 두보의 시론에 관한 것이다. 이는 곧 두보는 어째서 그렇게 위대한 것일까라는 의문에 대한 궁구이기도 할 것인데, 선생은 두시(杜詩)는 시로서의 위대함을 치밀함과 초월성이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갖고 있으며, 이 두 측면이 상보적으로 통합됨에서 찾는다.
두시의 치밀함: “이것은 우선 인간의 사실이나 자연의 사실을 섬세한 부분까지 관찰하려는 숙시熟視, 끝까지 관찰한 것을 마음속에서 곱씹는 숙려熟廬, 그리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데에서는 매우 치밀한 언어로 나타납니다.”(p.15) 즉 두시는 섬세한 시선, 성찰의 깊이, 언어의 조탁의 탁월함을 두루 갖추었다는 점에서 치밀함을 가진다. 그 중에서도 선생이 두시의 위대함을 보이기 위해 강의에서 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시선의 섬세함이다. 두보가 노래하는 자연과 사람의 정경들은 선생이 예로 들고 있는 아이들이 장난치는 정경問事競挽鬚, 무릎 위에 쏟아지는 달빛明月照我膝, 달빛을 머금은 이슬이 한 방울씩 잎새 끝에 모여 떨어질 듯 말 듯 매달려 있는 풍경重露成涓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지극히 범용하고 미시적인 모습들에까지 다다른다.
두시에서 보여주는 자연과 인간의 세밀한 정경에의 묘사는 육조 시대의 시가 갖지 못하였던 것이고 그리하여 두보는 시의 개혁자였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러한데, 우선 두보의 세심함은 자연의 우울한 풍경까지도 포착함으로써 우울한 자연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시의 외연을 넓혔다. 육조의 시인에게 자연은 아름다움의 전형이었고 혹은 윤리의 모델이기까지 했으며, 따라서 시인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을 뿐 유쾌하지 않은 풍경은 시로서 조형하지 않음이 당시의 '시의 습관'이고 예의였으나 두보는 그 습관의 밖으로 나와 있는데, "결국, 댓잎 위의 이슬까지도 바라보려 한 섬세한 시선은, 섬세한 까닭에 세계의 모든 것에 눈길을 주려 하는 넓은 시선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이 유쾌하지 않은 풍경도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이 음울한, 그러나 새로운 풍경은 역시 치밀함의 결과이고 효과입니다."(p.21-22). 또한 두시는 묘사의 치밀함을 詩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도 육조 시대와 다르다. 선생이 인용하고 있는 '시는 감정에 연유하여 기미하고詩緣情而綺靡, 부는 사물을 체현하여 유량하다賦體物而瀏亮'는 육기의 말이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육조 시대의 시詩는 찰나적이고 충동적인 감정을 짧은 언어에 담아내는 것이며 감각이 접촉하는 것을 치밀하게 묘사함은 부賦의 임무였으나, 두보는 부의 영역인 사물의 치밀한 묘사마저도 자신의 시에 흡수함으로써 시의 자각적 개혁을 이루어냈다.
두보시가 가지는 모사의 세밀함과 적확함은 공전절후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그것만이 그의 시를 위대함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니다. "두보시가 뛰어난 것은 단순히 시선의 섬세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다른 차원의 세계를 파고드는 의욕, 앞서 제가 썼던 말로 말씀드리자면 비약의 방향, 초월의 방향이 병존하기 때문입니다."(p.33) 현상을 극도로 세밀하게 포착하면서도 그에 그치지 않고 대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진실에까지 가 닿으려는 초월의 방향이 두시에는 공존하며 두보는 이를 예민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초월의 방향 역시 두보 이전의 육조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가 육조시와 다른 점은, 육조시는 여전히 감각을 따르기만 할 뿐으로 수동적이다. 이에 비해 당시는 더 능동적으로, 무한정한 세계로 파고들려고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p.32) 두시가 가지는 이러한 초월에의 관심, 그러니까 현상의 배후에 존재하나 그 윤곽을 드러내지 않는 진실을 추적하는 것이야말로 문학의 임무이다.
선생은 치밀함과 초월에의 비약이 상보관계에 있다는 것이 두보 스스로의 자각이요 그의 시론이라고 말한다. "치밀함은 초월성을 동반하기에 더욱 치밀하고, 초월성은 치밀함을 동반하기에 더욱 초월성을 갖는다. 감각에 비취는 것을 치밀하게 관찰하는 것이 그 배후에 있는 것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고, 거꾸로 또 배후를 이루는 것에 대한 관심, 즉 비약하려는 의욕, 초월하려는 의욕이야말로 감각에 호소하는 것을 충분한 치밀함으로 포착하게 된다."(p.34) 두보의 시가 고금제일의 지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결국 시선과 사유, 형식의 모든 면에서의 섬세함과, 현상 배후의 진리를 포착하려는 비약 -사실 이 두 가지는 문학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의 양면에 있어서 공히 가장 탁월하였으며, 언뜻 보기에 상반되는 두 요구를 가장 완벽하게 통합해냈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선생은 두보시의 주된 감정인 고독감의 근원을 두보시의 독보성에서 찾는다: "두보시에 넘쳐나는 고독감은 실생활에서, 세상의 중심에서 튕겨져 나온 인간으로 살아야 했던 측면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아마도 두보뿐만 아니라 뛰어난 시인이 언제나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 그것을 감지하고 자각한 데서 나온 것일 터입니다."(p.44) 두보는 시의 비의(秘意)를 홀로 알고 있었기에 고독했다.
2.
여기까지가 강의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지만, 나는 이 짧은 강의를 읽으면서 선생에 대한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두보는 위대하다. 중국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도 이백 정도만이 그와 자웅을 겨룰 만하며, 아마 세계의 모든 문학 중에서도 두보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것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위대함을 아는가? 그러니까 남들이 다 위대하다길래 아무 것도 모르면서 두보는 위대하다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하는 것은 아닌가? 선생은 정말로 두보시가 왜 위대한지를, 그의 시를 인용하면서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중국의 시라고는 거의 모르는 나도 선생의 친절한 설명을 따라서 두시와 주해를 읽으면서 두보가 왜 위대한지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고금의 문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두시를 읽어내는 선생의 힘에 있다. 강의를 읽으면서 나는 거의 문단마다 '어떻게 여기까지 읽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것까지 알고 있을까'라는 감탄을 했다. 시어의 미묘한 뉘앙스까지 읽어내는 선생의 힘은 찬탄과 더불어 부러움과 질투심까지도 불러일으킨다. 선생의 경지는 아득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