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든파티 - 영국 창비세계문학  
캐서린 맨스필드 외 지음, 김영희 엮고 옮김 / 창비(창작과비평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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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세계문학> 시리즈의 출간은 나뿐 아니라 많은 독서애호가들에게 반가웠을 것이다. 각 출판사마다 마치 전쟁이라도 치르듯 문학 전집을 퍼내지만 정작 독자의 입장에서는 겹치는 작품도 많고 권수도 방대해서 선뜻 손이 가지 않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창비는 달랐다. 국가별로 구성된 점이나 단편을 중심으로 엮은 점이 반가웠다. 아홉 개의 국가들 중 하나를 선택하기가 쉽진 않았지만 결국 모두 읽게 될 테니 여행 떠나는 기분으로 가장 끌리는 곳부터 손 내밀어 보기로 했다. 마침 내가 여행을 다녀온 프랑스와 영국이 포함되어 시작은 한결 수월했다. 경험상 프랑스 문학은 어려워서 그나마 귀족적이고 로맨틱할 것 같은 영국을 택했다. 가본 나라가 영국이 아니었다면 당연히 미국을 택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영미 문학이 편하고 좋다. 늘 읽으려고만 애썼지 정작 읽은 작품은 몇 되지 않아 따지고 잴 필요도 없이 읽어나갔다. 최근의 독서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고, 덕분에 고전읽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깨달았다. 영국편 <가든파티>는 여덟 작가의 열 한 작품을 담는다. 고전이라고 하지만 19세기 중엽에서 20세기 중엽까지 비교적 가까운 시대에 쓰인 작품들이라 특별히 고루하거나 낯선 느낌을 받을 수 없는 점도 <창비 세계문학> 시리즈의 완성도를 드높이는데 한 몫 한다. 아마 실린 단편 하나하나가 소중한 느낌이 드는 것 또한 같은 이유일 것이다. 찰스 디킨스나 토머스 하디, 버지니어 울프, D.H 로런스는 나에게 우상과 같은 존재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들은 내 학창시절을 지킨 몇 안 되는 작가들에 속한다. 네 명의 작가가 완전 소중한 반면, 또 다른 넷은 새롭다. 작품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작가들이 가진 성향이나 문체, 또 다른 작품들을 배제할 순 없겠지만 나는 되도록 <가든파티>에 실린 텍스트 중심으로 글을 구성해나가려 한다.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화려한 향연이다 보니 주제나 소재는 무척이나 다양하다. 하지만 억압되어 있던 사회가 급변하는 틈에서 두 차례 세계 대전을 겪으며 탄생하다보니 대부분의 작품이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다.  

<신호수>는 철도역의 외딴 초소에서 신호등을 관리하는 신호수의 일상에 유령이라는 존재를 등장시켜 삶의 고독함과 끝없는 기다림을 통해 자신이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던 무감각한 자의 전도된 비극을 그린다. 다른 작품들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오그라든 팔>은 돈 많은 농장주인 남자를 둘러싼 본처와 후처, 두 여인의 기다림과 고독을 통해 성과 계급의 문제를, <진보의 전초기지>는 섬을 지키는 두 군인의 나태와 욕망을 통해 지독한 전쟁을 겪은 세대의 두려움과 절망을 보여준다. 제임스 조이스의 두 작품 <애러비>와 <구름 한 점>은 각각 아동기와 성년기를 통과하는 주인공을 내세워 인간이 거쳐야 하는 필수 시기의 일상성과 깨달음에 대해 다루어, 당시의 허무주의나 오갈 데를 몰라 갈팡질팡하는 이들의 내면을 잘 통찰하고 있다. 버지니어 울프의 <큐 가든>은 아름다운 이미지가 깔려있지만 줄거리보다 의식의 흐름에 치중한 탓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반대로 <유품>은 흥미 있게 읽었다. 아내의 유품인 일기를 읽으며 남편이 느낀 배신감이 주된 줄거리인데 아내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숨은 사연을 짐작하면 가슴 깊은 곳을 건드릴 정도의 아픔이 배어나는 것 같다. D.H 로런스의 <차표 주세요>와 <말장수의 딸>은 역시 작가 특유의 주제인 남녀관계나 성문제를 피해가지 않는다. 자칫 선정적일 수 있는 민감한 소재로 남녀의 역할을 분명히 가르면서도 새로운 성 역할 모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한편 유일하게 단편 전문작가라 해도 과언 아닌 캐서린 맨스필드의 작품이면서 <창비 세계문학> 시리즈의 영국편 표제이기도 한 <가든파티>는 삶과 죽음, 계급과 윤리의 문제를 소녀 로라의 시선을 통해 다소 이중적 시선으로 그린다. 가든파티를 열만큼 호화스런 중산계급의 딸 로라가 죽어가는 사람을 직접 마주하며 마침내 깨달은 진실은 어떤 것이었을까. 어느 한 편에선 가든파티가 열리고, 또 다른 한 편에선 누군가가 죽어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란 걸 깨달았을까. 이 작품이 주는 열린 결말은 내가 한 번쯤 로라가 되어보게 한다. 마지막으로 <지붕 위의 여자> 역시 여자의 몸을 엿보는 남자 인부 셋을 내세워 성과 계급이 얽혀드는 지점을 그리고 있다. 
 

이처럼 배경과 소재가 모두 다른 작품이지만 놀랍게도 비슷한 분위기와 이어진 주제들이 엿보인다. 억눌린 이들의 고립감과 고독, 외로움이 전면에 깔렸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감이 엿보일라 치면 다시 비극으로 치닫는 상황에선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말 그대로 빅토리아 시대에서 세계대전을 거치며 현대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탄생한 소설들. 급박한 변화는 부적응을 낳기에 충분했고, 전쟁이 준 폐해는 소설 속 주인공들의 가슴 하나하나에 스펀지처럼 스며들었다.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그들의 몸부림은 기껏해야 스스로 고립되거나, 비극적 인생을 맞이하거나, 서로의 몸속에서 위안을 찾는 것뿐이었다. 페미니즘 작가가 아니라도 여성의 권리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나 D.H 로런스, 도리스 레씽이 여성과 계급에 관련된 작품을 여럿 쓴 것도 그들만의 위안이나 치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계급사회가 평등사회로 바뀔 때, 남성 우월적 가부장제 사회가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사회로 변할 때, 생산 중심의 사회에서 소비 중심의 사회로 탈바꿈 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견디고 어떻게 이겨냈을까. 이겨내지 못하는 이들은 또 어떻게 살았을까. 영국편에 실린 작품 하나하나는 모두 영국의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도기를 사진처럼 잘 포착하고 있다. 보통 한 권의 책에 여러 단편이 엮이는 것이 통설이지만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 해도 주제나 특징 등 그 관련성을 하나로 모으기가 쉽지 않다. 독자의 입장에서 그것을 찾아내거나 글로 표현하기는 더 어려운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창비 세계문학> 영국편의 구성은 깔끔하고 탐스럽다. 다양한 이야기를 거쳐 하나의 주제에 가 닿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장점이다. 영국편을 통해 다른 국가의 작품들에 호기심과 기대감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고전은 그래서 고전이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읽혀도 당시의 시대와 삶을 느낄 수 있기에 오래 그리고 널리 읽히는 것이다. 영국뿐 아니라 대한민국 땅에서도 나는 전쟁을 겪은 세대가 아니다. 어느 때보다 급박한 사회변화 속에 내던져져 살아가고는 있지만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시대에 태어나 절대적 가난과 정신적 고통 같은 어려움을 겪지도 않았다. 나는 살아보지 못한 시간을 마치 직접 살아내기라도 하듯이 생생히 겪을 수 있는 시간은 독서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책 속에서는 누구의 삶도 내 것이고, 그 곳이 어느 시대의 어디든 모두 내 것이다. 그래서 감히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지금부터 당신을 가든파티로 초대합니다. 응하시겠습니까? 응하든 응하지 않든 그건 당신의 자유다. 




 
 
 
휴먼 스테인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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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와 같은 고민을 언제부터 하게 됐는지 생각해봤다. 아마 나무랄 데라곤 전혀 없는 천재적인 음악성을 타고났으면서도 자신의 피부색과 뿌리가 한계가 된다고 믿은 나머지, 목숨을 걸만큼 위험한 강도의 성형수술과 피부이식을 서른 번이나 했다는 마이클 잭슨의 이야기를 처음 들은 중학교 국어시간 이후가 아니었을까. 흑과 백 같은 이분법적 논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이치라는 걸 전혀 몰랐던 나의 열여섯. 그러고 보니 필립 로스가 그리는 <휴먼 스테인>의 배경이 바로 내가 인간이라는 존재에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중학교 시절의 무렵이다. 이건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일까.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자신의 집무실과 백악관 주차장 등지에서 스무 살을 갓 넘긴 여비서와 사랑을 나누며 세계가 떠들썩할 정도로 강도 높은 스캔들을 선물했던 바로 그 해는 주인공 콜먼이 일흔 하나의 나이에 서른넷의 포니아와 사랑을 나누던 때와 일치한다. 버크셔 산악지대의 오두막에서 세상과 결별한 채 글을 쓰는 네이선은 콜먼을 세상에서 가장 잘 이해하는 한 사람, 콜먼의 친구이자 대변인 그리고 작가로 등장한다. 우린 네이선을 통해 콜먼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느낀다. 
 

콜먼은 은퇴한 대학교수다. 유태인으로서는 유일하게 학장을 지낼 만큼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고, 학장으로서의 콜먼이 이룩한 업적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우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치는 일로 자존감을 찾고 싶었던 콜먼이 자신의 강의 시간에 오래도록 출석하지 않는 학생들을 두고 유령들(spooks)이란 표현을 썼다가 하필 그 단어에 검둥이들이란 뜻이 있다는 이유로 인종차별주의자로 몰려 온갖 비난을 당하고 쫓겨나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아무리 호소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억울함 때문에 항상 씩씩하다고만 생각했던 아내 아이리스를 잃게 되자 콜먼의 슬픔과 절망은 극에 달한다. 그를 절망의 수렁에서 구해준 이가 바로 서른넷의 포니아다. 그녀 또한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계부에게 성희롱을 당한 상처로 집을 떠났다. 훗날 결혼하지만 남편 역시 베트남 전쟁의 상흔으로 끊임없이 포니아를 괴롭히는 등 녹록치 않은 삶을 산다. 그래서인지 콜먼과 포니아는 만남과 동시에 서로의 결핍과 상처를 알아본다. 성공한 유태인인 줄 알았던 콜먼이 사실은 마이클 잭슨과 같은 인종 정체성을 앓아온 점이나 똑똑한 포니아가 스스로 문맹인을 자처해 살아가는 점은 비록 충격이긴 하나 20세기 끝자락의 비극을 잘 나타내준다. 
 

그들의 사랑은 포니아 남편의 끈질긴 방해로 결국 파멸을 맞는다. 그것이 모두가 진정 원한 삶이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원한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과거를 숨기거나 버려야만 나아갈 수 있었던 콜먼과 포니아가 사랑에 빠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콜먼과 포니아를 둘러싼 세상은 호락하지 않았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받는 괄시는 흑인으로서 받는 멸시보다 오히려 나았고, 어린 딸이 당한 희롱을 친엄마조차 믿어주지 않는 현실을 견디려면 아는 것을 모른 체하며 살아가는 게 편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고립되었다. 콜먼과 포니아는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만든 건 세상이지만 세상은 그들을 상처 속에 살게 했다. 피부색을 바꾸고, 생김새를 고치고, 아는 것을 모른 체 한다 해서 달라지는 것이 세상은 아니건만, 마이클 잭슨이 그랬듯 콜먼과 포니아 또한 뾰족한 대안이 없던 탓이다. 화가 난다. 철이 든 순간부터 나는 나를 무시하는 사람보다 나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이 더 불편했다. 누가 어떻게 나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흑과 백, 로맨스와 불륜, 아름다움과 추함, 행복과 불행. 그런 것들만 인생인가. 성별, 나이, 학력, 통장잔고. 그런 것들만 나인가. 도대체 나를 나답게 하는 기준과 삶을 삶답게 하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이며, 기준이 있다한들 어떻게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자꾸만 세상이 어렵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나다. 또한 콜먼과 포니아처럼 살고 싶지 않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야 살 수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해도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결심의 첫 번째 증거로 감히 콜먼과 포니아의 영원함을 옹호한다. 비록 비아그라를 복용해야 하고, 육체의 탐닉이라는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더라도 나는 그들을 응원할 것이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분노이므로. 우린 누구나 어떤 것에 속해있는 동시에 어떤 것에도 속해있지 않다. 흑백논리나 편견, 선입견 같은 것들은 결국 오점으로 작용할뿐더러 아무데도 도움 되지 않는다. 일흔 한 살의 남자가 서른 네 살의 여자를 사랑하면 안 된다는 규정은 어디서,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다는 논리는 어디서, 나와 타인이 다르다고 둘 중에 하나가 틀렸다는 억지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아마 그런 억측들이 이 세상을 만들었을 것이다. 타인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고, 나를 나답지 못하게 하고,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있는 그대로가 가장 아름다운 것. 나는 필립 로스의 모든 문장들을 버리고 내가 만들어낸 단 하나의 문장만을 가슴에 담는다. 20세기 후반의 가장 미국적인 문제들은 21세가 10년이나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누군가는 아직도 성형수술을 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사랑 앞에 망설인다. 또 누군가에게는 정의에 눈감고 불의에 동조하는 것이 삶의 전부다. 결국 필립 로스가 말하는 <휴먼 스테인>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내일의 문제이고 미래의 문제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인류가 공통으로 고민해야 할 사항이다.




 
 
 
풀밭 위의 식사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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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웠다. 더 외로워졌다. 요즘 느끼는 기분을 단지 외로움이란 단어에 가둘 수 있다면 차라리 나았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몰랐다. 눈앞에 닥친 시간들이 벅찼고, 누군가와 나의 기대에 숨찼고,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멈춰버리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시간을 견디는 것 외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을 절실히 믿으며 버티는 나날이었다. 특별한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아가려 할 때마다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쳐 나가떨어지는 꿈을 여러 번 꾸었다. 상처 입은 나비처럼 나도 모르게 자꾸만 몸을 사렸다. 나이 탓인가. 마음이 도전과 안주 사이를 널뛰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결정된 것 없는 20대의 끝줄기가 이토록 처절하게 외로울 줄 미처 몰랐다. 이대로 서른이 올까봐 두려웠다. 놓지도 못하고 잡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서 깜빡 든 낮잠처럼 놓쳐버린 시간은 누릴 틈도 없이 쉽게만 멀어져갔다. 그런데 누경을 만나면서, 더더욱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에 나는 몸서리쳤다. 그녀는 나와 닮았으며 또한 달랐다. 적어도 그녀는 버티고 있었다. 숨으려고만 한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어느 누구보다 내 삶에 자신이 있었다. 일도, 사랑도, 삶도, 꿈도 내 것이면 다를 거라 믿었다. 지나친 긍정과 막연한 자신감이 오히려 화근이었다. 가족이란 이름의 틈바구니에서 삶이라는 고통과 마주하며 사랑이란 감정에 온 마음을 내맡기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다가올 내 30대도 누경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두려웠다. 자꾸만 다가오는 기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꼬꼬마였던 아홉 살부터 열여섯 소녀시절도 모자라, 심지어 청춘이 모조리 지나갈 때까지 온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이름 모를 끌림을 어쩌지 못해 기다림과 어긋남을 반복하는 서강주와 그녀의 관계 때문에 호흡이 가빴다. 지옥과 천국을 넘나드는 기분. 딱 그것만치 어지러웠다. 도대체 사람이 사람에게 끌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는 그것에 대해 오래 그리고 깊이 생각했다. 막 스물다섯. 그때 나도 그랬다. 딱히 계획이랄 것도 없이 기대만 충만했던 어느 겨울, 한 달 간의 유럽여행 끝자락에서 마음을 흔드는 사람을 만나게 된 건 단지 그곳이 이국적인 풍경을 가진 예술의 도시였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이후로 쭉 파리는 다시 가지 못할 꿈의 도시인 것만 같다. 그를 만난 겨울은 봉인된 봉투 속 편지처럼 비밀스러운 곳에 갇혀서도 여전히 숨을 쉰다. 열 시간의 물질적 거리와 여덟 시간의 시차만이 그와 나를 가르는 전부는 아닐 것이다. 다만, 3년 전 내가 과연 지금의 나와 같은 사람이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는 것이 이상할 뿐. 누경의 서강주를 향한 마음이 처음부터 사랑은 아니었듯, 시간과 공기만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관계는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굳이 이해하거나 받아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껏 그래왔듯 누경과 서강주는 서로를 그리워하는 시간 속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견뎌야 할 것이다. 그게 인생이다.
 

누경에게 한없이 다가가려는 또 다른 남자 기현은 왜 하필 누경이었을까. 누경은 왜 기현이 아니라 인서였을까.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으로 만든 사랑의 묘약이 정말 있기라도 한 것일까. 그렇다면 삶은, 세상은, 사랑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정석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삶이란 것은 원래 유리와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투명한데, 그래서 절대로 흐릿해지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당하기 힘든 우리의 마음이 자꾸만 유리와 스테인드글라스를 흐리게 하는지도. 누경이 서강주를, 기현이 누경을 끝없이 기다려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가진 숙명이기 때문이지, 누경의 헝겊인형 때문이거나 기현이 들은 점쟁이의 말 때문이 아니다. 우린 누구나 본능적으로 나를 간직해둘 곳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져지지 않는 사람을 만지려 애쓰고,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삶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붙잡아둘 수 있는 것은 없고, 다시 돌아나가지도 못할 것이다. 원래 그런 거니까. 그래서 모두에게 삶이 이토록 벅찬 것 아닐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상처를 있는 그대로, 추억도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있던 그 자리에 돌려놓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 그래서 이 긴긴 소설을 읽으며 내가 생각한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세 노르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을 안고 일상적 상황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럴 것이다. 라는 말. 나에게는 물론, 파리에 있는 나의 아저씨에게도, 누경과 기현, 누경의 꿈속 아버지에게도, 여전히 알쏭달쏭해서 잘 모르겠는 서강주에게도, 더불어 삶에 지치고 사랑에 미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도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정말 우린 모두 자신의 진실은 감당하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억울해서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주문처럼 이 말을 되뇐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세 노르말.
 




 
 
 
정조의 비밀편지 - 국왕의 고뇌와 통치의 기술 키워드 한국문화 2 
안대회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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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키워드 한국문화 시리즈의 출간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아니었다. 대학 졸업 후 다시 수험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한국사는 필요해서 공부하는 과목이라는 느낌을 버릴 수 없었다. 또 한 번 학창시절의 교과교육을 탓했다. 꾸벅꾸벅 졸거나 딴 짓을 해야만 견딜 수 있었던 국사 시간의 내 모습이 떠오르자 덩달아 기분도 가라앉았다. 도대체 옛날 왕들이 다른 나라를 정복하고, 새 왕비를 받아들이고, 시도 때도 없이 파벌 싸움을 한 일이 지금에 와서 무슨 의미가 얼마나 있단 말인가. 다행히도 그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시작한 한국사 공부는 학창시절에는 느끼지 못했던 쾌감을 가져다주었고, 좁은 독서세계를 한층 넓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아마 그 이후부터일 것이다. 나도 사람이라 더 관심가고 덜 가는 부분은 분명히 있었지만 과거를 아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하는 구나 자각하게 된 건. 사극 드라마를 보는 재미가 한층 강렬해진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역사 속 인물을 현실세계로 불러내는 일은 때때로 친한 친구와 수다 떠는 일보다 훨씬 즐거웠다. 나는 그렇게 한국사와 친해졌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폭넓고 긍정적인 변화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워드 한국문화 시리즈는 지루해만 보였다. 그 날이었던 것 같다. 원하는 무언가가 한없이 멀어져가는 것만 같던 날, 가만히 앉아 키워드 한국문화 시리즈 목록을 차근차근 짚으며 한국사가 처음 내 안에 들어올 때 느꼈던 벅찬 감동과 연관시키려 노력했다. 그러자 여러 주제 가운데서도 <정조의 비밀편지>는 단연 눈에 띄었다. 마음을 다스리자 비로소 호기심이 솟았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 정조는 역사 속 인물을 통틀어 내가 가장 관심 있는 인물이라 해도 과언 아닐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정조의 비밀편지>를 읽어나가게 했다. 책을 덮은 지금, 의문은 더 커졌다. 실제 정조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는 200년 전에 살던 한 인간으로서의 정조가 정말로 궁금하다. 국왕으로서의 정조와 인간으로서의 정조, 그리고 정조시대를 우린 과연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가? 어떻게? 역사는 절대로 전부 드러내지 않는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타인의 비밀은 묘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정조의 비밀편지>는 후손들에 의해 소중히 보관되다 이제야 밝혀진 「정조 어찰첩」의 문건에 관해 다룬다. 6첩 297통으로 드러난 「어찰첩」은 정조가 심환지라는 고위관료 한 사람에게만 4년 동안 보낸 편지를 일컫는다. 정조가 지속적으로 폐기하라고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심환지가 국왕의 명령을 거역함으로서 세상에 남아있어, 공식 사료가 드러내지 못한 비밀정보까지 고스란히 담은 사료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는 폐기명령에서도 알 수 있듯, 단순히 안부를 묻는 편지가 아닌 고위 관료에게 정치현안을 제시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역할을 하는 편지로서, 편지가 오간 4년 동안 조정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의 비밀스런 면까지 드러내어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새로운 사료는 다른 시각으로 역사를 되짚어 보게 한다. 때문에 「어찰첩」의 존재는 정조와 정조시대를 드러내는 가장 기적적이고도 사실적인 사료가 되었다. 내용면에서 또한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공식 사료와 충돌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시파는 정조의 친위세력이고 벽파는 정조의 적대세력이라는 기존의 역사적 통념마저 재검토해야 할 영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국왕이 태어나면서부터 갖추어야 할 덕목이 어디 한둘일까만,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늘 너그럽고 부드러운 편에 속했던 정조의 기존 이미지를 뒤집을만한 사료가 나온 것이 충격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숨겨진 것이 한층 더 역사답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평소 정조의 통치기술을 대할 때면 국왕이 한없이 너그럽고 온화하기만 한 성정(性情)으로 국가를 제대로 통치할 수 있었을까 싶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이 사실이 낯설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처럼 정조에 대한 기존 통념에 의문을 가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어찰첩」. 「어찰첩」이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 기존에 알려진 정조나 정조시대와 어떠한 점이 다른지 정확하게 아는 것 또한 중요하겠지만 그건 역사학적으로 오랫동안 연구해 나갈 일이고, 비록 책으로 나온다 해도 어마어마한 양으로 정리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내가 알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다. 그래서인지 「어찰첩」의 내용을 분석하기보다 뒤늦게 발견된 정반대의 새로운 사료를 통해 달라질 수 있는 역사의 시각과 자세에 중점을 두는 <정조의 비밀편지>는 오히려 신선하면서 의미 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은폐한다면 진실은 드러나기 힘든 법이다. 흔히 하늘 아래 비밀은 없다고들 하지만 과연 역사를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도 적용되는 말일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과 발명품은 세상에 전해지는 양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양이 불타거나 사라졌다고 한다. 기존의 것만으로도 충분히 뛰어난 역량의 예술가로 꼽히기에 오늘날에도 굳이 문제되지는 않는 부분이지만 그를 좋아하는 예술애호가로서 그의 작품을 모두 보지 못한다는 사실은 가끔 안타까움으로 귀결되기도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정조의 비밀편지>가 말하고자 하는 바 또한 그것이다. 「어찰첩」으로 인해 기존 역사의 통념을 능가하는 국왕 정조와 인간 정조, 완전히 다른 정조시대의 복잡한 정치적 행위에 대한 비밀이 밝혀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전체 조각을 모른 채 부분을 보고 판단하는 역사가 과연 진짜라고 할 수 있을까. 
 

아버지로 인해 비극적 죽음을 맞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할아버지 영조가 취한 정책과 끝없이 비교 당하는 현대 역사교육 속 정조의 정치 업적, 정조의 적대세력인 벽파와 정순왕후가 손잡고 한 일로 여겨지는 역사적 의문에 휩싸인 정조 독살설 등 일련의 굵직한 역사적 사건과 더불어 역대 어느 왕보다 사려 깊은 국왕으로 기억되는 정조의 일대기는 이미 밝혀진 것만으로도 거부할 수 없이 매력적인 동시에 더 없이 비극적이다. 많은 이들이 어진 국왕으로 정조를 꼽는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재임 시절 내내 견제 세력과 끝없는 싸움을 벌여야 했던 정치 상황도 한 몫 한다. 거기에 「어찰첩」을 더하면 정조의 매력은 한층 더해진다. 뛰어난 필체로 편지쓰기마저 즐기는 상냥한 왕이었다니. 게다가 어찰과 함께 폐기명령을 받고도 이를 어긴 신하라니. 역사는 정말 예측이란 말이 불가능한 놀라움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영역이다. 개인적으로 「어찰첩」의 내용과 정조시대 정치를 교묘히 파헤칠 책이 기다려진다. 나는 지금 역사가 새롭게 쓰이는 멋진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를 대하는 자세는 한없이 진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연구가나 역사를 통해 먹고 사는 직업을 가진 사람, 하다못해 어진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위치의 사람이 아니라면 정조가 어진 국왕이었든 폭군이었든 살아가는 데 그다지 상관없는 얘기일 수 있다. 오래된 이야기는 그저 어제 다음 오늘이 오고 오늘 다음 내일이 오는 것만큼이나 별 볼일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역사읽기는 좀 더 열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의 삶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다. 역사를 보는 새로운 시각과 사고는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일이겠지만 깊게는 자신의 인생과 목표를 둘러싼 세계를 다시금 둘러보게 하는 의미를 가진다. 역사를 통해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란 걸 스스로 깨닫는 데만도 학창시절은 물론 20대 초중반을 고스란히 바쳐야 했지만, 그래서 더욱 「어찰첩」의 존재가 반갑다. 정조의 통치 기술과 정조시대 정치의 실체를 파헤치는 일은 여전히 먼 훗날의 일이다. 키워드 한국문화 시리즈 중 한권인 <정조의 비밀편지>가 더욱 소중해지는 이유도 바로 정조와 정조시대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했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역사를 통한 자각과 깨달음이 그저 뿌듯하기만 하다. 정조의 개혁과 학자풍 또는 성군의 이미지를 여전히 기억하는 이에게 「어찰첩」이 밝히는 국왕 정조의 노련한 정치가로서의 풍모는 반드시 더해져야 할 하나의 혁신적 진실이다. 마지막으로 키워드 한국문화 시리즈를 통해 많은 이들이 한국사나 한국문화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계 미술사의 재발견 - 고대 벽화 미술에서 현대 팝아트까지 
메리 홀링스워스, 제정인 / 마로니에북스 / 2009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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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언제부터 관심있게 보면서 즐길 줄 알게 되었는지 생각해봤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지만 관심은 주로 이야기 중심인 문학에 편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다음 관심사를 꼽으라면 단연 역사가 될 것이다. 대학에서 배운 현대문학사는 문학사에, 문예사조론은 예술사에 관심을 갖게 했고 그러자마자 미술사에 흥미가 생겼다. 나는 세상에서 그림을 가장 못 그리는 사람이고, 무언가를 뚝딱 만들만한 손재주도 전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 음식, 철학, 종교 등 다양한 분야의 공부나 경험을 위해 해외여행을 꿈꾸겠지만 난 청춘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단 바로 그 미술사 때문에 유럽여행을 떠났다. 한달 간 믿음이 되어줄 단 한 명의 친구는 다행히도 건축학도였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둘 다 지독한 국내파였다는 데에 있지 않았다. 유럽에서 뭘 찾아야 하고 뭘 찾을 수 있을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비행기를 탔다는 데에 있었다. 그건 몰라서 더욱 의미있는 여행일 수도, 아쉽게 다음을 기약하게 되는 여행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보이는 만큼 느끼게 되는 것이 여행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책을 만나기 전 나는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를 읽는 중이었다. 매번 미루기만 했던 책인데 시작이 반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미술의 ㅁ에도 가까이 가지 못할 만한 양을 떠듬떠듬 읽으면서 그래도 좋았다. 시작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세계 미술사의 재발견>은 미술사의 전 시대를 다루는 점에서는 <서양 미술사>와 다르지 않다. 도판도 많이 실렸고 해설도 자세해서 초보자가 읽기에도 부담없다. 그래도 어렵다면 처음엔 그저 도판과 해설만 읽어내려가도 문제없어 보인다. 좀 익숙해지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해당 시대나 사조를 읽는 식으로 말이다. 개인적으로 15세기 이후 르네상스 시대를 가장 동경하기도 하고 관심이 많은데 사진과 설명이 한가득이라 행복해하며 본 것 같다. 아직 미술사를 총망라할 자신이 없어 전체 흐름을 먼저 파악하는 걸로 대신했다. 고대 벽화미술에서 현대 팝아트까지 긴 미술사를 다루는 방대한 양 치고는 가격도 저렴한 것 같다. 마로니에북스의 예술관련서적은 워낙 믿을만한 브랜드이기도 하지만 왠만해선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세계 미술사를 요약하기란 굉장히 어렵고도 힘든 작업이라 서평이지만 내용을 논할 수가 없는 점이 안타깝다. 작은 도판으로 실렸지만 여러 작품들의 포스는 어김없이 전해져 온다. 바티칸 박물관에서 본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떠오른다. 내가 본 것은 관광객들에게 보이기 위해 따로 만들어진 모조품이었지만 하루종일 돌아다니며 본 어떤 작품들보다 오래 기억에 남았다. 숭고함과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박물관 풍경을 간파한 것도 <피에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지창조>나 <아테네 학당>, <최후의 심판> 또한 작품 자체보다는 감상하는 짧은 시간동안 든 생각이 오랫동안 아련한 느낌으로 남아있다. 바티칸의 고요한 기운보다 수많은 관광객의 시끌벅적함을 더 많이 느껴서인지 오래된 작품들 앞에서도 평온한 기분이 들었던 게 약간 아쉽긴 하다. 책을 보며 유럽 각국의 박물관에서 본 그림 뒤의 미술사들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집중했다. 소화한 것보다 소화되지 않는 것이 더 많은 지금은 국사책만큼 미술사책을 가까이 하는 자세보다 중요한 건 없을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박물관. 그보다 좀 덜 아끼는 루브르 박물관에 다시 갔을 때 그곳에 있는 작품들에 대하여 누군가에게 설명해줄 수 있는 날은 과연 올까. 미술사에 관련된 나의 가장 소박한 목표는 루브르 박물관의 르네상스 작품들을 스스로 정리할 수 있는 실력만이라도 갖는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대이자, 좋아하는 작품들이 즐비한 르네상스를 설명할 수 있는 날까지 세계 미술사는 여전히 도전 과제일 뿐 정복대상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