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산책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는 이미 시리즈 열풍을 몰고 다니는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이지만 내겐 지난해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후 두 번째 요코미조 세이시 作이다. 소년 탐정 김전일의 할아버지, 긴다이치 코스케가 등장하는 연속 시리즈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요코미조 세이시를 한 번이라도 읽은 사람이라면 작가가 현시대인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 것이다. 정작 작가는 내가 나기도 전인 1981년에 영면했다. 일본 본격 추리소설의 거장이라는 평가를 받는 작가는 <밤 산책>을 전후시대인 1948년 2월부터 1949년 12월까지 잡지에 실었다. 그런데 놀랍다. 지금 읽혀도 전혀 손색없는 멋진 추리소설이기 때문이다. 전후세대다운 탐미적 문체가 매력적이고, 현 과학의 잣대로 보면 한없이 시시해질만 한데도 여전히 탄탄한 논리를 발휘하는 트릭은 쓰인지 60년이나 지났다고 보기엔 믿기지 않을만큼 치밀하다.

이 소설은 밤에 걸어다니는 병을 가진 후루가미 가문의 끔찍한 연쇄살인을 추적한다. 어느날 후루가미 가문의 딸 야치요에게 '나 조만간 그대에게 가서 결혼하리다'라는 편지와 함께 목이 잘린 꼽추의 사진이 배달된다. 이후 어느 바에서 전후의 유명한 꼽추화가 하치야가 총을 맞는 사건이 벌어진다. 범인은 바로 야치요. 그녀는 왜 하치야에게 총을 쏘았을까. 마침 야치요가 꼽추화가 하치야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다면 그 일은 그저 헤프닝으로 지나갔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건은 거기서 시작이었다. 하치야와 결혼을 선언한 야치요가 그를 후루가미 저택으로 초대하자 이상징후를 느낀 나오키는 삼류추리소설을 쓰는 작가인 나, 야시로 도라타에게 함께 저택에 가달라고 부탁한다. 나오키의 아버지 데쓰노신을 비롯, 센고쿠 집안은 대대로 후루가미 가문의 가신혈통이다. 저택에는 야치요를 비롯해 몇 년 전 죽은 후루가미 오리베를 대신하여 그 자리를 차지한 데쓰노신, 엄마 류, 아홉 살 많은 오빠이자 오리베의 아들인 모리에, 그리고 나오키가 함께 지낸다.

야시로가 나오키의 부탁으로 저택을 방문했을 때, 머리 없는 꼽추의 몸사체가 발견된다. 꼽추화가 하치야 뿐 아니라 후루가미 가문의 유전병으로 모리에 또한 꼽추였기 때문에 사체의 신원은 쉽사리 밝혀지지 않는다. 과연 사체는 누구이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또한 후루가미 가문의 야치요나 데쓰노신, 나오키는 모두 밤에 걸어다니는 병, 몽유병을 갖고 있다. 누구든 언제라도 범인이 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사건의 실체는 미궁으로 빠진다. 죽은 사람이 꼽추이므로 희생자는 하치야 아니면 모리에가 되는데 사건 후 둘 모두 모습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사체의 다리에서 발견된 상흔은 야치요가 저격한 하치야와도, 모리에의 유모가 말하는 모리에의 숨겨진 상처와도 모두 일치하는 부분에 있다. 도중에 야치요가 사라지면서 사건은 다시 중지된다.

야치요는 귀수촌에 있다. 사건의 전말은 공개되지 않은 채 다시 장소를 옮기는 소설은 또 한 번의 끔찍한 살인을 맞이하면서 본격적으로 접어든다. 몽유병 증세로 밖에 나간 야치요가 머리 없는 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야치요와 체격이 비슷하고, 방금 전까지 야치요가 입고 있던 잠옷을 입은 몸의 사체는 과연 누구의 사체일까.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 때 나타난 우리의 탐정 긴다이치 코스케. 그는 어떤 추리로 또 한 번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인가. 또 살인자는 무슨 이유로 머리만 가져가는 이런 끔찍한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걸까. 야치요를 둘러싼 나오키와 모리에의 불꽃튀는 결투. 그 속의 탐욕과 질투를 눈치챈 삼류추리소설가 야시로는 과연 비밀을 밝힐 수 있을까.

드러나는 비밀은 충격적이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전작들이 그런 것처럼 가문에 얽힌 추악한 비밀의 복수이자 증오가 이번 사건을 만든 것이다. 범인이 누구인지, 어떤 비밀이 숨겨진 것인지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는 사람만 안다. 물론 성급하게 마지막 페이지만을 넘겨본 사람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밤에 걷는 병에 걸린 후루가미 일족의 불륜과 질투로 얼룩진, 깔끔한 전후 추리소설의 탐미를 맛보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소설이다. 머리 없는 시체, 몽유병, 꼽추. 이 세 가지 요소만으로도 어딘지 모르게 오싹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다. 참, 나오키의 숨겨진 여인 시즈카의 정체와 야시로와 야치요와의 관계 또한 끝까지 읽어야만 알 수 있는 진실이다. 밤에 산책하지 말자. 대신 <밤 산책>을 읽는 것은 괜찮다.


 
 
 
당신 없는 나는? 
기욤 뮈소 지음, 허지은 옮김 / 밝은세상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욤 뮈소의 소설 분위기는 매번 비슷하다고들 했지만 처음이라 그랬는지 전작 [사랑을 찾아 돌아오다]를 읽을 때 나는 전율을 느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뛰어나게 재밌었다거나 독특했다거나 할 만큼 개성을 가진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바로 그 편안함과 익숙한 이야기 속에서 빛을 발하는 사랑의 감동과 특이한 구성 덕분에 좋았다. 영화처럼 속도감 있게 시공간을 넘나드는 구성이 특히 이야기를 빛나게 만들었다 그 때는. 그런데 이젠 아니다. 그의 작품이 연일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면서 쏟아지듯 출간되었을 때 하나같이 영원한 사랑을 주제로 삼은 그의 작품들이 어딘가 모르게 비슷한 감성에 비슷한 양념을 지닌 뻔한 이야기일거란 생각은 빗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TV드라마처럼 다가오는 뻔한 이야기가 때로는 더 감동적이란 걸 알고 있었다. 이야기를 마감하는 마지막 한 톨의 반전은 눈물날 만큼 사랑을 동경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차피 하늘 아래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고 했다. 같은 이야기라도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누군가를 감동시키기도 한다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알았다. 쉬운 이야기일 수록 읽기는 쉬워도 쓰기는 어렵다는 걸 몇 번의 습작으로 깊게 깨달았던 나는 한 번 읽으면 다시는 안 읽는다는 기욤 뮈소의 작품들을 모조리 사 모았다. 감성이 부족해지는 느낌이 들면 읽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 읽기도 전에 신작 [당신 없는 나는?]이 출간됐다. 어쩐지 행복이 풍부해지는 느낌이었다.

마르탱은 프랑스 태생으로 조부모와 함께 프랑스의 가난한 변두리 아파트에 살지만 스무살이 되던 해 두 달 간 샌프란시스코로 어학연수를 온다.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던 타국에서 역시 그와 비슷하게 갓 맞이한 20대를 보내고 있는 어여쁜 가브리엘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어김없이 돌아갈 시간이 찾아온다. 마르탱은 용기를 내어 자신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써서 그녀에게 건넨다. 가브리엘은 그의 마음을 받아주었고, 둘은 공항에서 재회한다. 조금만 더 있어달라는 가브리엘의 말에 그냥 떠날 수 없었던 마르탱은 사랑의 기간을 몇 일 더 연장해 샌프란시스코에 머무르지만 둘은 결국 헤어져야 하고 마르탱은 프랑스로 떠나야만 한다. 프랑스에 간 마르탱은 가브리엘을 그리워하면서도 열심히 일해 모은 돈으로 가브리엘의 비행기 티켓을 마련해 크리스마스에 뉴욕에서 만나자는 편지와 함께 띄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만나기로 한 카페에서 한없이 기다리는 마르탱과는 달리 가브리엘은 나타나지 않는다. 부모도 없고, 재산도 없어 늘 외로웠던 마르탱은 가브리엘을 그리워하며 다시 절망에 빠져 힘겨운 나날을 보낸다. 가브리엘은 왜 뉴욕에 오지 않았을까? 마르탱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일까? 그는 다시 가브리엘을 찾지 않는다.

그로부터 13년 후, 마르탱은 경찰이 되었다. 전설의 예술품 도난범 아키볼드가 범행을 저지를 것으로 기대되는 오르세 미술관에서 잠복중인 마르탱은 혼자 공을 세우려는 마음보다 그저 홀로 하는 수사가 편하다고 생각하는 부류다. 이상하게도 아키볼드를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잡고 싶은 강한 욕망이 일었다. 아키볼드는 30년이 넘도록 온갖 예술품을 훔치고 은행을 털었지만 손쉽게 감시망을 빠져나가 태연하게 다음 범행을 실행에 옮기는 천재 도난범이었다. 아키볼드의 수사파일을 수없이 읽고 분석한 마르탱은 아키볼드가 유명화가의 그림을 훔치는 날짜가 훔칠 작품의 화가 기일이란 걸 알아냈다. 이번엔 기필코 잡으리라 자신했던 아키볼드가 자신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훔친 그림을 센 강에 던지고 달아나기 전까진 자신이 왜 그렇게 아키볼드를 잡고 싶은지 미처 알지 못했다.

아키볼드, 그는 누구일까? 마르탱은 아키볼드를 잡기 위한 수사의 끈을 놓치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린다. 아키볼드가 강물에 던진 그림은 당연히 모조품이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마르탱 앞으로 태연하게 훔친 와인을 보내오는 아키볼드. 둘의 쫓고 쫓기는 싸움은 쉽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한참동안의 되풀이된 추적 끝에 서서히 드러나는 뜻밖의 아키볼드. 그는 13년 전 뉴욕에 나타나지 않았던 자신의 첫사랑, 바로 가브리엘의 아버지다. 경찰로서의 임무와 첫사랑의 아버지를 대하는 역할 사이에서 방황하는 마르탱. 프랑스와 샌프란시스코를 넘나들며 아키볼드를 추적하던 그는 드디어 첫사랑이자, 지금도 잊지 못한 가브리엘과 재회한다. 그들의 사랑은 다시 시작될 수 있을까? 쉽지 않다. 마르탱은 13년 전의 크리스마스 이브에 가브리엘이 뉴욕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가 몹시 궁금하다. 마음이 변해서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움과는 별도로 지금껏 단 한 번도 가브리엘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과거는 과거일 뿐, 미래를 보라고 깨우치며 다시 마르탱을 뒤흔들기 시작한다. 아키볼드와 가브리엘은 부녀지간이지만 가브리엘은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고 살아왔다. 아키볼드와 그의 사랑이자 가브리엘의 엄마인 발랑틴과의 관계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결말로 치닫는다.

하지만 마르탱은 아키볼드를 잡아야 한다. 가브리엘의 이유와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 아키볼드를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 계속 아키볼드를 쫓는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위에서 마지막 다툼을 벌인 끝에 함께 강물 속으로 빠진다. 둘은 혼수상태에 빠진다. 마침 자살기도로 병원에 실려온 열 넷의 소녀 리지. 뇌사상태 즉, 혼수상태의 세 사람은 삶과 죽음으로 가는 비행기 탑승구에서 만난다. 삶과 죽음을 향한 여행 티켓을 각각 한 장씩 쥐고 있는 셋에게 일어난 일은 이 소설의 첫째 반전이다. 둘째 반전은 바로 13년 전의 크리스마스에 가브리엘이 뉴욕에 가지 못한 이유, 셋째 반전은 필요도 없는 그림들을 목숨과 인생을 걸고 훔친 아키볼드의 딸을 향한 사랑이다. 반전 셋은 일단 숨기기로 하지만, 당신 없인 살 수 없다는 마르탱과 가브리엘의 사랑은 해피엔딩이란 걸 얘기하고 싶다. 작은 소녀 리지도 깨어나고, 아키볼드와 발랑틴의 사랑도 해피엔딩이다. 기분 좋다. 사랑은 아름답다. 변치 않는 영원한 사랑이란 게, 생을 다 바칠만큼 오랫동안 이어지는 마음이란 게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기욤 뮈소가 그려내는 사랑은 언제나 아름다운 행복이다. 세상 누구도 사랑 없인 살 수 없다. 스토리상으로는 완벽하게 구성된 [당신 없는 나는?]을 읽는 동안 만큼은 누구나 사랑의 영원함에 환상을 가질 수 있기를.


 
 
 
<밥상혁명>을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밥상 혁명 - 세상을 바꾸는 21세기 생존 프로젝트 
강양구.강이현 지음 / 살림터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만 보고는 웰빙 먹을거리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줄 알았다. 나는 토종 한국 음식을 잘 먹고, 때로 음식을 가리는 사람이고, 음식에 관해선 특별히 신경쓰지 않는 편이라 우리 농산물을 사먹자는 주장으로 귀결될 것이 뻔한 이 책을 읽을까 말까 망설였다. 약간 뭉클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촌스러운 표지를 보자니 구성까지 너무 지루할 것 같아 선입견이 더 커졌다. 모처럼 재밌는 프로그램이 하길래 TV를 보는 도중 한 번 훑어봤더니 의외로 주제 구성이 흥미롭고 사진도 실려있고 우리의 푸드와 외국의 푸드, 그러니까 푸드의 매커니즘을 훑는 생태, 환경학적 도서라 역시 책은 일단 들춰보아야 안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더 좋은 건, 저자가 각 챕터마다 함께 읽기 좋은 비슷한 주제의 책을 추천해 주는 것이다. 짧은 설명과 함께 곁들여 주니 좀 더 관심 있는 분야는 다른 책을 찾아보기도 쉽다.

[밥상 혁명]은 상당 부분 지역 먹을거리를 중요시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첫 장부터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그것은 바로 2003년 9월 10일 농민 이경해 씨의 죽음이다. 당시 멕시코 칸쿤에서 세계화에 항거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국내 언론은 그의 죽음을 단순 사건으로만 다뤘을 뿐, 그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심도있게 짚어보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잊혀졌다. 죽어가면서 남긴 한 마디만이 이 책에 실려있을 뿐. "열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매일 열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보다 낫다."

평소 국제사회의 문제들을 다양하게 다루는 MBC의 <세계와 나 W>를 종종 본다. 처음엔 그저 우리나라 아닌 다른 나라의 문화, 사회, 생활 모습을 접할 수 있는 게 좋아서였는데 다양한 국가들의 사회문제를 고발하며 지구촌의 공존과 화합에 대해 묻는 것이 점점 불편해진 건 세계가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편협한 개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전, 기아, 정치 문제 등 여러 가지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카카오나 사탕수수 농장의 아이들이다. 정작 자신들은 먹지도 못할 것을 수출하기 위해 충분하지 않은 보상을 받으며 일하는 이들을 보며 이쪽에선 안 먹어도 살 수 있는 기호식품을 생산하기 위해 저쪽에선 굶어 죽어가며 일하는 것이 비정상적으로 느껴졌다. 알고보면 지구촌의 공존이란 것은 결국 그런 비정상적 구조 위에서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우리 농민이 지은 곡식과 채소를 두고도 다른 나라 농민이 어떻게 지었는지도 모를 곡식과 채소를 사먹는 우리의 현실. 그래서 우린 덜 신선한 식품을 먹고, 그로인해 우리 곡식과 채소는 설 땅을 잃고, 그 위에서 다시 수입과 수출의 경제 순환이 반복되고. 그러다 보니 소가 사람을 잡아먹는 세상이 온 것도 당연한 것이다. 전 세계 인구가 먹는 식량의 1/3을 소가 먹고 있다니, 그래서 제 3세계의 국가에선 사람이 굶어 죽는다니 지구촌과 세계화를 부르짖는 이 세상의 결말이 결국 그런 것이었나. [밥상혁명]의 논제는 로컬 푸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맞게 체제를 바꾸어 나가며, 소농을 살려야 농업은 물론, 농장이 살고, 국가가 살고, 전 세계가 산다는 거다. 일본의 맥도날드에서 만드는 햄버거에 사실은 일본산 고기나 채소는 하나도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만 봐도 먹을거리의 혁명은 이뤄져야만 한다는 생각이 든다. 자급자족이 반드시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최대한 자급자족을 했을 때 그 경제 순환 고리에서는 어떤 국가에서는 남아도는 식량이 존재하는 반면, 또 다른 국가에서는 5초에 한 명씩 아이가 죽어가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먹을거리 때문에 목숨을 잃지는 않아도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젠 농사짓는 일이 생소할 정도로 농업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우리의 주식은 쌀이다. 세계화가 자급자족의 방향으로 진행되기 시작하고, 실제로 미래의 모습이 그렇게 변한다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많은 사람이 굶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특별히 FTA의 장단점에 대해 논할 만큼 나는 지식이 깊지 않다. 하지만 FTA가 우리의 농민을 죽여 이익을 얻는 것이었단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 그리고 [밥상 혁명]은 그렇게 우리 입에 들어가는 먹을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닌 남의 것이란 사실을 상기시킬 뿐이다. 내 것이 깨끗할까, 남의 것이 깨끗할까? 약간의 이득 앞에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한 댓가는 언젠가 반드시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로컬 푸드가 가능한 지역적 거리는 얼만큼일까? 영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은 50킬로미터, 미국은 하루에 운전해서 갈 수 있는 300킬로미터를 의미한단다. 이왕 먹을 것 자기 지역에서 나는 먹을거리를 먹으면 신선도도 좋고, 농민도 살고, 나아가 국가도 살고 세계가 사는 것이다. 단기적으로 이득을 취할 방법이라면 얼마든지 있겠지만 로컬 푸드로도 충분히 인간답게 살 수 있다.

당장 코카콜라, 초콜릿, 커피를 먹지 않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일인지 안다면 그 누구라도 밥상혁명을 일으키는 데 찬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이 책을 읽어도 좋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유럽과 미국, 아프리카와 남미, 그리고 제 3의 국가들이 어떻게 먹을거리에 대처하고 있는지, 넘치는 식량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는지 알게 될 것이다. 예전에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와 일맥상통하는 책이기도 하고, 마침 저자가 이 책을 추천하기도 한다. 함께 읽어도 좋겠다. 밥상혁명은 언젠가 실험대에 오를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혁명이 되어야 할 인류의 거대한 과제이기도 하다. 공정무역이 착한 소비로 각광받듯, 밥상혁명도 우리 스스로를 위해 반드시 이뤄야 할 일이다. 무조건 돈으로, 이익으로 모든 것이 괜찮을 거라는 이기심 말고 좀 더 깨끗한 양심으로 임할 때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운 세계화를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굿바이, 사교육>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굿바이 사교육 - 내 아이를 학원에 보내고 싶지 않은 학부모를 위한 교육 필독서 
이범 외 지음 / 시사IN북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세이도 아니고 서평을 쓰면서 내 자녀관을 열거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 책을 말하자면 그 얘기부터 해야 될 것 같다. 내 나이 스물 여덟. 나는 6년째 사귀는 애인이 있지만 아직 미혼이고 결혼 계획은 더군다나 없고 세상 모든 여자가 생의 안정적 선택과 행복을 위해 결혼을 꿈꾼다면 나는 좀 다르게 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사람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결혼보다 유학이 더 고픈, 안정된 삶보다 도전적인 삶을 꿈꾼다. 그렇다고 결혼을 안하겠다거나 결혼이 나쁘다거나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저 가정이란 테두리에서 여자가 해야 하는 아내와 엄마 노릇을 잘할 수 있을까 겁이 나는 것 뿐. 그치만 나도 언젠가 내게 생길 아이를 꿈꿔 보기는 한다. 순전히 내 욕심과 상상, 즐거움으로 기능할 뿐이지만. 예쁜 딸을 낳아서 무용이나 피아노, 그림을 시켜보고 싶다는 꿈을 꾼 적이 있다. 그저 예쁘고 창의적으로 자라나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오로지 내 기대만으로 이루어진 꿈이지만 어쩌면 진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품었다. 하지만 내가 낳았다고 해서 자녀의 인생이 어디 내 것인가. 지금보다 좀 더 어릴 때 했던 철없는 생각은 어느새 접히고, 문득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내게 아이가 생긴다면 나는 그 아이의 모든 기회를 박탈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 세상은 태어나 먹고 자는 걸로 다가 아니니까. 나는 내 능력과 힘과 지혜를 더 기르고 싶어졌다.  

[굿바이 사교육]은 어느 한 사람이 본 사교육 세상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교육에 일가견 있는 7명의 글을 한데 모은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라는 단체에서 기획한 모음집이다. 내 아이를 학원에 보내고 싶지 않은 학부모를 위한 교육 필독서라는 부제가 달려있기도 하다. 처음에 나는 당황했다. 사교육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분야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책이라 해도 주인을 잘못 찾아왔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알아서 나쁠 건 하나도 없다. 관심 반, 무관심 반으로 읽어나가기 시작했는데 세상에, 너무 재밌는 거다. 학부모에게는 정말 구세주와도 같은 책이다. 교육의 제도, 구조, 시기, 방향, 정책, 방법까지 넘나들며 학부모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니, 더불어 교육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도 우리나라 교육의 전반적인 매커니즘을 훑어주니 이건 절대로 시간 낭비가 아니다. 오히려 가뭄에 단비 내리는 느낌이다. 물론 교육은 정책이나 구조적 문제가 가장 크다. 그리고 한 번 잘못된 방향을 타버리면 되돌리는 방법을 알아도 쉽게 되돌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나 인생에 한 번 뿐인 아이들의 인생을 뒤바꿔 놓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실패라는 게 허용되지 않는 분야이기도 하다. 시범으로 이리저리 정책을 바꾸면 애꿎은 아이들만 피해를 본단 말이다. 물론 그 아이들의 학부모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교육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 더욱 확고한 기준과 올바른 지도가 필요한 영역이다. 우리나라의 사교육. 오래 전부터 있어왔고 무엇이 문제인지도 파악할 수 있지만 고쳐지지 않는 고질병. 그건 고질병 말고는 다른 단어로 설명 불가능하다.   

지금 이 책에서 설명하는 정책과 구조, 사회전반의 분위기는 내가 자녀를 낳아 기르고 있을 쯤엔 전혀 다르게 변해있을 수도 있다. 이건 좀 희망사항이긴 한 문제지만 그만큼 교육정책과 방향이 갈팡질팡 두서가 없단 말이다. 높으신 분들은 일단 이렇게 해보고, 안되면 또 저렇게 해본다. 그 와중에 사교육만 드세지고 엄한 사교육비에 가정이 휘청거리고 소통과 빈곤 문제는 더욱 심화된다. 뿐만 아니다. 사교육을 담당하는 학원만 호황이다. 그런데 학원은 또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가? 이렇게 열거하기 시작하면 교육의 문제점은 끝도 없다.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문제는 결국 정책과 구조, 공교육의 문제가 된다. 공교육이 똑바로 자리잡지 못하니까 사교육이 필요한 것이고, 국가 정책이 갈대 같다보니 학부모들은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게 된다. 돈이 줄줄 새어 나갈 수 밖에 없다. 영어 조기교육은 정말 아쉬운 점 중에 하나다. 국제화 시대에 너도나도 영어를 배우는 건 좋다. 그런데 우리나라 말로도 표현력이 어색한 미취학 아동을 영어캠프에 보내고, 그보다 좀 더 자란 초등학생을 남들이 다 간다는 이유로 영어연수를 시킨다. 부모가 그 정도 과용 능력이 있으면 또 어느 정도 괜찮다. 그런데 대부분 그렇지 않다. 문제는 순환된다. 사교육, 사교육, 사교육이 문제라는 말은 여기서 생겨난다.  

학창시절을 10년 정도 지나보니 이제 알겠다. 공부란 게 일단 머리나 실력보단 끈기와 집념이 먼저 필요한 영역이라서 처음부터 공부에 흥미가 없는 아이에겐 학원이나 연수보다 공부에 가깝게 다가가도록 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과학고, 외고 하더니 이젠 중학교도 시험 봐서 들어간단다. 공부를 잘하고 좋아해서 성적이 뛰어난 아이라면 뒷바라지를 하는 게 마땅하지만 세상에 획일적인 공부 말고 다른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학창시절이 알려주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그게 없다. 공부 잘하면 좋은 대학 가고, 대기업 가고, 결혼도 잘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서 부모들은 너나할 것 없이 자녀에게 공부를 강요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런 부모님 밑에서 자라지 않았다. 공부를 잘하면 나중에 보상받을 일이 있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았지만 나는 공부를 그다지 즐기지 않았고 잘하지도 않았다. 후회되는 부분이 있긴 해도 공부에 대해 아쉽진 않다. 공부도 못하고 다른 것도 못하는 아이였단 게 좀 후회스러울 뿐. 나도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홀든처럼 학교를 때려칠 용기라도 있는 아이였음 좋았을 걸 싶을 뿐. 이 책을 보다보니 우리나라와 미국, 유럽의 교육제도를 비교하는 도표가 인상적이었다. 파리에 갔을 때 아는 분이 타국생활은 외롭고 힘들지만 언젠가 자녀를 프랑스에서 학교 다니게 하고 싶다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공부는 하려는 사람에게 시키고, 그것도 좋아하는 공부를 하게 하고, 나머지는 또 나머지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런 교육은 어디 없을까? 교육을 말하는 건 끝이 없을 것 같다. 좀 엄한 구석으로 튀는 듯한 발언이지만 능력을 길러 돈을 왕창 모은 다음 프랑스로 이주해야 할 것 같다. 다른 건 모르지만 유럽 몇몇 국가의, 특히 요즘 유행하는 핀란드의 교육제도는 진짜 솜사탕 같은 달콤함이다. 너무 부럽다. 제발, 이 땅의 학부모들이여, 정부 정책에, 사교육 방식에, 옆집 아이 영어연수에 기죽지 말고 나만의 반듯한 기준으로 자녀를 길러보자. 하나 둘씩 실천하다보면 정부도, 사교육 시장도, 옆집 부모도 핀란드식으로 바뀔지 어떻게 아나. 하여튼 먹을거리도 돈, 교육도 돈, 무조건 돈돈돈 하는 이익에 급급한 세상이 인류의 모든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 같다. 




 
 
 
내일로부터 80킬로미터 - 알래스카와 참사람들에 대한 기억 
이레이그루크 지음, 김훈 옮김 / 문학의숲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득, 북극이 어딘지 모르겠다. 알래스카는 또 어디지? 북극과 남극은 또 뭐가 다른 거였더라? 언젠가 화가 나서 던진 지구본이 박살나서 다음 날 마치 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마트에서 지구본을 찾아 헤매던 때가 있었다. 전기를 꽂으면 불이 오는 꽤 커다란 지구본을 사들고 집에 돌아오면서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그즈음 어떤 책 부록으로 달려온 디자인이 예쁜 세계지도를 벽 한 켠에 붙여두었다. 유럽이든 미국이든 지중해든 남미든 북극이든 여기 아닌 어딘가로 여행을 꿈꾸던 대학 때였다. 눈을 뜨면 자연스레 지도로 눈이 가던 시절, 양면 테이프로 어설프게 붙어있던 지도가 자꾸 떨어지길래 접어 어딘가에 넣어둔 것 같은데 그 이후로 세계지도를 펼쳐본 적은 없었다. 지도도 자꾸자꾸 구석 자리로 밀려났다. 그렇게 꿈도, 세계여행도, 북극도 멀어져간 모양이다.

지난해 코펜하겐에서 기후변화회의가 열린 후 내 눈에는 자연스레 환경, 생태 보고를 다룬 책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독서를 꾸준히 하다보면 출판계에도 당연히 유행의 흐름 같은 것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신문을 읽는 것 만큼이나 시각을 넓힐 수 있다. 소설과 자기계발서에서 인문과 과학 도서를 넘나드는 취향을 기르는 게 좀 힘들지만 이번 기회는 내게 반가웠다. 평소 과학이나 환경에는 영 무관심 했는데 비록 환경도서는 아니지만 북극의 기후와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책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일로부터 80킬로부터]는 세계지도 숙지에 미숙한 내게 너무 먼 땅, 알래스카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삶과 생활을 의미있게 다루는 동시에 자신들의 문화가 무조건 옳다고 믿는 이들에게 다른 삶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곧 말로만 지구촌이라고 노래하는 이들의 거짓된 양심에 일침을 가한다.

알래스카. 1년의 반은 하루종일 밤이고, 또 반은 하루종일 낮이 계속되는 곳. 얼음과 눈으로 둘러싸인 곳. 그곳을 날짜 변경선에서 동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졌다고 부르는 모양이다. 나는 여기가 왜 날짜 변경선에서 80킬로미터 떨어졌는지도 모르고, 지구본에서 정확히 그 지점을 짚어낼 수도 없지만 이 세상에서 아니 지구상에서 가장 자연과 가까이 사는 이들의 삶을 들여다 본 것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사람이 원하는 대로 자연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변화에 맞춰 사람이 바뀌어가는 것. 제도와 문명 아래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우리의 인식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 알래스카에 사는 이들의 삶은 우리의 모든 신념과 기대를 잠식시킨다. 때론 불안함으로, 때론 찬란함으로.

그 곳에 우리는 없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단지 먹을 것과 쉴 곳을 찾아 하염없이 길을 떠나며 살아가고, 자연 속에서 자연과 동화되어 살아갈 방법을 강구하고, 위험을 미리 감지한다는 이유로 목숨보다 더욱 소중히 여기며 동행하는 북극개들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이 세상 무엇과도 소통하고 조화되려는 그들의 삶은 새롭다 못해 굉장히 감동적이다. 드물기는 하지만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는 위험천만한 순간 개들을 잡아먹기도 한다는 사실만 빼면. 이미 가지고 있으면서도 좀 더 가지기 위해 피투성이가 되어야 하는 우리의 치열한 생존방법에 비하면 그들은 지나치게 태평하고 한가로워 보인다. 하루하루 살기 위해 살아내야 하는 것조차 생존싸움이겠지만 말이다. 지금껏 우리가 접한 알래스카의 모든 이야기는 제 3자의 눈으로 소개되었다. 우리와 별반 다를바 없는 환경에서 산 문명인 즉, 외부 관찰자가 알래스카에 가서 찍어온 다큐를 방 안에 앉아 수없이 보았다. TV는 그런 존재다. 단 며칠을 알래스카에 가서 관찰한다고 그들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또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관찰자의 시점으로 쓰인 글이 아닌 것이다. 알래스카 출신이자 알래스카에서 생을 보낸, 여전히 알래스카 사람인 저자가 자신의 삶과 생의 터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말한다. 우리는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하고. 우린 진정으로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산다고 선뜻 대답할 수가 없겠다. 그건 애초부터 그렇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린 언젠가부터 나와 다른 어떤 것을 인정할 용기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래스카 사람들의 하루하루 충실한 이야기를 들으면 부끄러운 것이다. 살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나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문명을, 우리의 편리를, 우리의 게으름과 나태함을, 우리의 급박함을 원망하게 된다. 그래봐야 어차피 나는 이 땅에서 살겠지만 이제 여기 아닌 저기에 그들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들도 지금 우리처럼 행복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지켜주고 싶다. 지구 이 편에 사는 이들의 욕심으로 훼손되는 자연과 기후가 지구 저 편에 사는 평화롭고 행복한 이들의 터전을 빼앗는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고 싶다. 그리고 지켜주고 싶다. 알래스카 사람들도, 알래스카의 눈과 얼음도, 알래스카의 온전한 밤과 낮도, 알래스카의 모든 생명체들도. 그런 생각으로 머릿속을 까맣게 채운 지금도 나는 여전히 내일로 내일로 잘만 흘러가고 있다. 마치 그들에게 닿기라도 할 것 마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