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전철에서 『근대의 어둠을 응시하는 고양이의 시선』이라는 책을 보고 있었다. 선배가 무슨 말을 하기 위해 나를 불러냈는지 짐작하고 있었지만, 또 나는 그렇게 거절하고 돌아오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여하간 찹찹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뭉뚱그려진 마음으로, 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어느 역부터 내 옆에 앉으셨는지 알 수 없지만, 오늘 내게 6.0 이상의 강도로 다가오신 그분, 할아버지 혹은 노신사와의 벼락같은 조우는 이러했다.  

그분 : 독서하는데, 방해가... 

나 : 네? (화들짝 반, 적개심 반) 

그분 : 그 책 재미있나요? 꽤 집중해서 보는 것 같아서. 

나 : 아~ 네, 아~ 재미있습니다. 

그분 : 책을 많이 보나요? 학생은? 

나 : 아~ 그건 아니구요, 그리고 학생도 아니구요, 그냥, 그저 심심하고 무료해서요. (버벅버벅)

그분 : 제목이?  

나 : 『근대의 어둠을 응시하는 고양이의 시선』입니다. 정선태씨가 쓴 글이구요. 

그분 : 응...그런데 겁이 많아 보여요? 인상도 그렇고, 자세도 그렇고. (미소) 

나 : (뭐래? 작업이래? 아~ 내가 나이를 먹긴 먹었구나, 할아버지가...) 뭐..그다지... 

그분 : 멍이 잘 들지 않나요?  

나 : 아~ 네, 잘 들어요. 몸이 좀 부실해서요. 

그분 : 마음에 멍도 잘 들지 않나요? 

나 : (이건 또 뭐래? 도를 믿으세요, 뭐 그런 부류의 할아버지? 그러기엔, 세련된, 어...신종?) 아뇨, 마음에 멍이라니...잘...그런데 저 이제 내릴겁니다. (뭐냐? 왜 내려? 여기가 어디래?) 

그분 : 괜히 놀래켰나 보네요. 몸이 안좋으면, 아직 젊어 보이니까 꾸준히 운동하세요. 그리고, 호신술 배워봐요, 세상이 참 무섭잖아요. 낙법도 배워보구요. 잘 넘어지는 사람들은 그거, 낙법이 도움이 많이 되거든요, 그리고, 책도 많이 읽으면 좋긴한데, 실전에서 강해야지요. 사람 많이 만나요. 아파도 보고, 다쳐도 봐야지요. 자꾸 아프고 다치다 보면 마음의 낙법이라는 것도 배우게 되요. 안다칠 수는 없어요, 사는 일이, 그러니까 잘 다치는 법을 배워야죠.  

나 :............. 

내릴 역도 아니었는데, 냅다 내려 버렸다. 마음의 낙법이라, 마음의 낙법이라, 잘 다치는 법.........할아버지 누구세요? 도대체? 누구시랍니까? 그리고 여기는 어디랍니까?



 
 
 
<리영희프리즘>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리영희 프리즘 - 우리 시대의 교양 
고병권.천정환.김동춘.이찬수.오길영.이대근.안수찬.은수미. 윤형.김현진 지음 / 사계절출판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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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라는 이름을 앞에 두고, 이 책을 읽으며 떠올렸던 상념들을 무슨 말로 옮겨야 할지 막막하다. 어차피 이 책에 글을 올린 필자들처럼 리영희,라는 프리즘으로 현실 사회를 진단할 능력이 없음을 제 깜냥에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고개 숙여 큰 절이라도 한 번 하고 싶었고, 선생님이 살았던 시절보다 어쩌면 더 가망 없어진 시절을 어찌 살아내야 하는지 무슨 나침반 하나라도 거져 얻고 싶었다. 끈 떨어진 마음이 갈 곳 몰라 떠돌고 있다고 자백하는 꼴이니, 알고는 있었지만, 사람 덜 된 꼴을 이렇게도 확인하는 요즘이다.

90년대 초반, 내가 대학이라는 곳에 발을 들여 놓고, 사회과학연구소라는 모호한(?) 성격의 동아리를 기웃거리며, 그곳에 있던 쌘(지금 보면 무섭지도, 선동적이지도 않지만 그땐 그렇게 보였다) 책들을 읽기 시작할 무렵 선배로부터 건네받은 책이 [우상과 이성]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선배는 나를 잘 못 골랐다. 리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을 읽은 후, 되려 쌘 책들과 멀어졌고, 선배들의 주입식 교육을 의심했고, 자연스럽게 주변인으로 겉돌기 시작했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생각의 스승'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훌륭한 '정보'나 '견해'를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라고 고병권은 이 책에 적고 있다.  

정녕 그러했다! 절대의 이름으로 맹목적으로 외우고, 익히던 시절에 마침표를 찍게 한 사람, 내가 안다고 믿었던 신, 인간, 사회구조, 주의, 냉전, 자본 그리고 나 자신마저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한 사람, 그가 리영희,였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IMF라는 재갈이 물려, 무한 경쟁이라는 시절을 벼락처럼 맞아야 했고, 그에 따라 수적으로는 다수일지라도 구조적으로는 소수로 전락하는 사람들의 곁을 멤돌면서, 국가도 조직이라고 본다면, 조직의 명운이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어떻게 개인들을 위축시키는지, 조직원으로서 더 잘 조련되는지를 맥없이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이 특별한 조련에 동원된 언론, 지식인 사회, 정치인들의 모습 또한 꾸준히 봐야만 했다. 리영희 선생님이 전 삶을 걸고 완강하게 싸운 [우상]을 떼거지로 목도한 시절이었다. 또한, 사회가 지능적으로 잔인하다는 것도, 그에 대한 각 개인의 대비가 이렇게 허술했구나,라는 사실도 이처럼 일목요연하게 경험할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운 시절이었다. 물론, 그 이후 시장이라는, 신자유주의라는 우상이 자리를 잡고 가망 없는 시절이 노골적으로 시작되면서, 그 시절 내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지만 말이다.    

얼마 전, 보험설계사 한 분을 만났다. 요즘처럼 영업이 힘든 건, 일을 시작하고 10년이 넘었지만 처음이라고 했다. 해약은 많고, 가입은 적다고. 진심은 아니었지만, 경제 대통령 시절이고, 경제가 좋아진다고 하고, 토건 사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데, 어째서 현실 경제가 그리 얼어붙었을까요,라고 나는 물었다. 내 음험한 물음에 중산층이 점점 무너지니까요,가 그분의 대답이었다. 중산층이 무너지다뇨,라고 계속 말꼬리를 물고 싶었지만, 그분이 무슨 죄라고 내 비아냥을 참아내야 하는가 싶어 그만두었다.  

여튼 우리 사회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이 중산층뿐일까? 아니 중산층이라 정의되는 계급이 무너진다는 것이 경제적 의미에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일까? 구조적 소수자로 내몰리는 우리가 이 위기를 극복할 수는 있는 것일까? 현실에 대한 사유가 깊어질수록, 나는 엄혹한 시절을 살아낸 스승에게, 예의없는 태도로, 스승이 살았던 그 시절보다 더 가망 없는 시절을 살고 있다고 토로하고 싶었다. 최장집의 말을 빌려, 권위주의 시대처럼 명백한 부정의 때문에 정의가 쉽게 파악되는 시절도 아니고, 소수의 기득권 세력을 위한 질서도 그 외피를 바꿨을지언정 변하지 않은, 그러기에 무엇이 무엇인지, 그저 우르르 몰려 다니며 속고 속이는 시절이라고. 시장을 획득하기 위한 전쟁이 평화의 옷을 입고, 글로벌이라는 이름이 무한 경쟁을 재촉하고, 루저가 되지 않으려면 사교육에 올인해야 하고, 조직의 무탈을 위해서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개인쯤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며, 투자와 저축보다 투기만이 이 땅에서 살아남는 길이라는 것이 상식이 되어버린 시절이라고. 이보다 가망 없는 시절이 또 있을까 싶다고.

생각없는 노예로 죽어가는 삶보다 고통스럽지만 깨어있는 삶을 그리고 잠든 사람들을 깨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던 선생을 통해 각성의 기쁨을 맛보았지만, 정작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거대한 체제, 자본, 시장이라는 [우상]앞에서 정녕 어찌해야 하는지, 쪽팔림이라도 면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여전히 두려움과 기갈로 우왕자왕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또 한편, 따져 묻지도 말라는[우상]의 엄포앞에서 작은 용기, 내 삶이 피해입지 않을 정도의 용기로 맞섰으니까, 내가 할 몫은 다한거 아니냐고, 그런데 현실은 갈수록 왜 이모양이냐고, 계속 불평만을 늘어놓는 나에게, 삶과 앎이 불일치한 너는 리영희,를 왜 읽었느냐고, 리영희,가 그저 지적 유희로 소비되었던 것이었냐고, 리영희,가 아니더라도 네가 읽은 책 속의 어떤 글 한 줄도 너의 삶을 바꾸지 못했다면 그 책들은 무엇하려 읽은 것이냐고, 이제는 선생이 다시 꾸짖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선생의 글이, 선생의 삶이 여전히 내 주위를 떠돌며 나를 부끄럽게 하고, 깨우치게 하는 한, 적어도 가망 없는 시절을 핑계삼아 어딘가에 숨는 일도 이제는 어려울 듯 싶다. 화끈거리는 마음은 쥐구멍 앞을 서성이지만 그도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선생님, 사랑을 목발 짚어 살아온 어느 시인처럼, 선생님을 목발 짚어 살아보려는 후학, 아니 후학이라고 혼자 우기는 이가 있습니다. 어떤 이유를 들어서도 반가우실리는 없겠지만, 그렇지만 말입니다, 선생님, 다독이고 독려해야 할 청춘이, 제가 아니더라도 아직 많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그리고 앞으로도, 강건하십시오.

 

  

 



 
 
 

호락호락 가지 않는 겨울이라서, 호락호락 오지 않는 봄이라서, 나는 좋아, 나는 좋아,라고 눈 내리는 밤, 한강을 내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무엇에 그리 쉽게 끌려다니던 마음이었는지, 나는 버티는 것들은 뭐든 대견하다고 토닥거리고, 심지어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 오래된 인형들에게 마저 눈인사를 하고, 찬물을 들이키고는 자리에 누웠다. 별 없는 밤은 잠도 별 일이 없는지, 쉬이 잠들지 못하고, 되려 불면도 대견해 하며 뒤척이다가 맞은 아침. 출근길에 귤 껍질을 버리려고 쓰레기 분리수거장 한 켠에 놓인 음식물 쓰레기통을 찾으니, 밤새 내린 눈이 소복이 덮여있는 쓰레기통 옆에 무언가 떨어져 있다. 들여다 보니, 모시조개다. 어느 짠 물에도, 어느 뜨거운 국물에도 버텼는지, 조개는 몸을 닫고 있었다. 거 참, 봄도 버티니까 너도 버텼구나,싶어 모시조개를 주워 다시 찬찬히 살핀다. 조개의 발인지, 손인지, 혀인지, 아주 조금 벌어진 틈으로 붉은 살이 삐죽 나와있다.  

버티겠다고, 제 살을 끊다니, 제 혀를 물다니, 그렇게 지키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는가, 살살 풀어놓은 소금물에 다 토해내지, 꾸역꾸역 토해내기라도 하지, 쩍 벌어진 몰골이 던접스럽더라도, 저렇게 버려질 것을, 오롯이 버려지기만 할 것이라는 것을, 그대의 치아에 씹혀보지도 못하고, 그대의 내장 안에서 굴러본 추억도 없이 저리 버려질 것을 몰랐더란 말이지, 틀렸구나. 내가 틀렸어. 호락호락 오지 않고, 버티고 또 버텨서, 기다리고 애닯게 온다고, 나는 좋아, 나는 좋아,라고 하면 안되는 거였구나.  

쩍 벌어진 봄이여, 호락호락 와라. 그래서 와락 안겨라. 그리고, 나 없이 어디선가 늙어가는 그대들이여, 벌어진 봄 틈으로 마음 한 자락 흘려다오. 잘근잘근 씹고, 혀로 얼려서, 넘실거리는 살 갈피마다 꽂아줄터이니, 그대여 그리고 그대들이여, 마음 한 자락 토해내서 보내주어라. 봄, 그래도 봄이지 않는가.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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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에게 조각이 무엇이더냐고 묻는다면, 그는 [거대한 바위에 들어있는 형상을 꺼내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제 시가 무엇이오, 그리고 철학이 무엇이란 말이오,라고 이 책의 저자에게 묻는다면, 그는 [삶을 낯설게 만드는 기술]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삶을 낯설게 만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상에서 우발적인 사건을 접하게 되는, 의도하지 않았고 그래서 준비되지도 않은 어느 시점, 그렇게 벼락 맞듯이 삶을 뒤흔드는 사건과 맞닥뜨리는 순간이 있다. 경험에 의하면 대부분 그런 순간들은 비젼으로서 제시된 이념과 구호들이 사실이라는 견고한 힘앞에서 무너져내리는 순간들이다. 이 책에 소개된 유하의 [오징어]라는 시를 보자. "눈앞의 저 빛!/찬란한 저 빛/그러나/저건 죽음이다./의심하라/모오든 광명을!"  어떤 이유를 들이대서라도 [모오든 광명을]향해 기를 쓰고 달려들던,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욕망을 자극하고 유효성을 제시하는지 한 번의 의심도 없이 몸과 마음을 다해 광명을 탐하던 내게 혹은 우리들에게, [욕망의 저 빛!],은 [죽음]이라고 말하는 시인이 있다. [광명]을 [죽음]이라는 기표로 치환함으로써 시인은 [광명]을 낯설게 만든다. 낯설어짐은 삶을 긴장하게 만들고, 이 긴장은 우리를 두리번거리게 혹은 멈추게 한다. 그리고 낯선 풍경을 사유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시는 가치론적인 측면으로만 평가될 수 없다. 시에는 존재론적인 측면도 엄연히 존재한다. 다시 말해 시가 언제나 삶을 낯설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미학적 측면만이 강조될 수도 있고, 시의 목적성 자체를 부정할 수도 있다. 여기서 이런 다양성이 배제된다면 그건 또 다른 폭력이기에 시를 읽고 시적 감흥을 혹은 낯설어짐을 경험하는 것은 온전히 독자의 취향에 맡기는 것이 온당하다. 그렇다면 철학은 어떠한가? 철학은 이 점에서 시와 구분될 수 있을 것 같다. 철학은 타자에게 건너가기 위해 또는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유하는 과정이고, 이 과정이 새로운 삶, 새로운 실천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기에 기존의 정서와 사유를 거스르는 측면이 시보다 강하고, 지속가능한 실천을 끌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태생적 무게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철학도 기존 정서와 사유를 거스르지 않는 영역이 있지만 그 부분은 논외로 하자. 

이 책에 소개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일부분을 보면 "아르헨티나와 예루살렘에서 회고록을 쓸 때나 검찰에게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아이히만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똑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 그의 말은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할 수 없음은 그의 생각할 수 없음, 즉,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없음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 진다. 그와는 어떤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과 타자의 현존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아이히만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유대인을 성실히 살해한 전범이다. 아이히만이 검거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을 지켜본 아렌트는 여타의 살아남은 유대인들의 분노와는 달리, 아이히만의 엽기적 행각을 개인의 악마적 본성으로 규정하지 않고, 타자와의 소통할 수 없음 그리고 그 근본에는 사유하지 않는 인간이 있음을 드러냈다. 다시 말해, 사유하지 않는, [무사유]가 [악]임을, 또한 그것은 아이히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향할 수 있는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철학은 마주하기 싫은 사실을 마주하게 하고, 그 낯설음을 강제하고, 이를 통해 사유하고 변화하기를 촉구하는 일련의 과정인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시와 철학은 인문학의 양 극단에 위치하고 있다. 시가 어떤 특정한 순간에 우리를 깨우는 죽비라면, 철학은 이 순간이 갖는 의미를 확대하고 재생산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시인들, 넘어설 수 없는 철학자들, 스스로 오라비라 이름 붙였던 그들앞에서 숱한 좌절을 한 내게 그럼에도 시를 읽어야 하고 사유해야 함을, 그래서 누구나 악일 수 있는 동시에 소수로 내몰릴 수 있는 현실에서 유연하면서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힘을 잃지 않기를 독려하는 이 책은 오랜만에 조우한 오라비처럼 반갑고 뜨거웠다. 역시나 오라비들의 즐겨찾기는 나를 실망시키지도 나를 우롱하지도 않는다. 다만 따라잡을 수 없는 거리를 확인시켜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 책은, 적어도 내게는 매우 애.닯.다.

 

 



 
 
동우 2010-03-09 05:22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바이님의 사변은 철학적이고 종장의 '매우 애닯다'는 시적이고.. 철학적 시읽기..

굿바이 2010-03-09 12:45   댓글달기 | URL
암껏도 아닌 것이 뭐라도 행세하고 싶어 말만 길어집니다. ㅜ.ㅜ
 
<빵과자유를위한정치>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 - MB를 넘어, 김대중과 노무현을 넘어 
손호철 지음 / 해피스토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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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의 규모와 무관하게, 한 집단안에서 리더 역할을 한다는 것이 쉬울 리 없다. 코흘리개 시절의 경험이 증명하듯 그 작은 집단의 우두머리도 힘들었었다. 하물며 결과에 따라 손익이 극명하게 갈리는 집단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따라서 우두머리는 필연적으로 비극적 상황을 즐기거나(?) 받아들일 용기를 가진 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여튼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우두머리로 지목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역사를 훑던 주위를 둘러보건 답은 명확하다. [사랑]받거나, [공포]를 유발하거나, [사랑]도 받고 [공포]도 행사할 수 있거나. 물론 여기서 [공포]는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카리스마 정도로 하자. 현직 대통령을 그리고 고인이 되었거나 생존하지만 생계가 어려워지신 분들을 위 조건에 대입해보면 [사랑]과 [공포]를 동시에 거머쥔 분은 안타깝게도 없는 듯 하다.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2009년을 떠올리면 개인적으로도 환난의 한 해였지만, 우리사회도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내 손으로 뽑고, 온전한 마음으로 지지를 보냈던 16대 대통령을 잃었고, 현직 대통령과 냉전적 보수세력의 부패와 오만을 목도해야 했고, 진보라 불려지는 세력들의 전략없는 정략에 기겁을 했고, 신자유주의에 눈 먼 우리들을 지켜봐야 했다. 참담함에 어이를 상실한 한 해였다. 주위에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전직 대통령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그때 나는 사랑해서 죄송하다고 했던 것 같다.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 죄,를 이렇게 치르는구나,싶다고. 치러야 할 대가가 내게도 남아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손호철교수의 [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를 읽는 동안, 불편했던 까닭을 나는 안다. 내 불편함의 절반은 나를 포함한 우리를 향한 것이고, 나머지 반은 저자를 향한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해가 져야 비상을 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대중의 움직임에 대해 사후적 해석만을 할 뿐, 언제 대중은 분노하고 언제 대중은 침묵하는지, 알 수 없는 나의 무력함이 안타까울 뿐이다"라고.  

문장을 읽히는 대로만 읽고 받아들인다면 저자는 본인의 무력함을 탓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리 읽히지가 않는다. 물론 저자의 고백 속에 담긴 진정성에는 동의한다. 억측이라고 할 수 도 있겠지만 내게 읽히는 저자의 진정성은 이런 것이다. 첫째는 대중을 가늠할 수 없다고 했지만 실은 대중을 향해 아둔하고 천박하다고 일갈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럼에도 대중에게 희망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 무력감을 느낀다는 것이리라. 내 추측이 오독이 아니라고 단정짓고 위의 문장을 곱씹어 본다면 부인하고 싶지도 않고, 변명하고 싶지도 않다. 나 역시 내가 포함된 우리를 향해 얼마나 많은 삿대질과 저주를 퍼부었는가. 그에 비하면 저자의 탄식은 절창에 가깝다. 그렇지만 역사가 증명하듯, 때로는 아둔하고 실익에 눈 먼 대중이 항상 소인배로서의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이었고, 또 그들이 정의와 소수를 지켜내기도 했던 사람들이다. 이것이야말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깍아내릴 수 없는 진실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현직 대통령의 정책을 서슴없이 비판하기도 하고,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활동을 하는 집단이 어떻게 잘 못 끼워진 단추들을 풀 수 있는지 역사를 근거로 설명하기도 하고, 꾸짖기도 한다.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다. 물론 저자를 향해 그리고 명민하고 진보적인 성향을 띈 학자들을 향해 그래서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또는 그대들은 이제껏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고 싶은 심정이 들지만 그건 치기임에 분명하다. 이미 답은 있고, 행동해야 하는 시절만 남아 있는데,필요없는 전력 소모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혹여 답답하고 불온한 마음이 남아 있다면 담벼락을 상대로 하면 그만이다.   

3월이다. 그리고 봄이다. 봄이 그러한 것 처럼 나는 현정권의 자살골에도 설렌다. 자살골에라도 기대어 현정권의 무능과 부패와 오만이 평가받기를 바라는 못난 마음이다. 그리고 한편 걱정이 앞선다. 봄이 그러하듯, 곧 꽃이 필 것만 같은데 꽃샘추위에 여린 꽃망울들이 주춤거리는 것처럼, 전직 대통령이 옥쇄하여 다시 살려낸 정당과 정치인들이 결정골을 날릴 전략도 각오도 배짱도 없어 또다시 우리가 주춤거릴까봐 겁난다. 그렇지만 그래도 봄이다. 봄이기에 봄은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언제나 봄이기만한 당신은 정작 봄을 믿는가? 나는 그것이 문득 궁금하다.

 

 

 



 
 
웬디양 2010-03-03 02:26   댓글달기 | URL
그들과 악수를 했지요.

치니 2010-03-03 09:36   댓글달기 | URL
추천!

굿바이 2010-03-03 13:14   URL
캬아~몸둘바를!

웬디양 2010-03-03 12:56   댓글달기 | URL
저 댓글은 술김에 쓴 댓글이고

언니 리뷰 다시 읽어보니 그저 슬플 뿐이고
전 저 대중에 대한 부분 때문에 제가 했던 말들이 그저 마구 떠오르면서 속상해지네요.

하연이가 입학했고, 언니는 무려 입학 축하쇼까지했으니,
봄은 봄이죠. 봄이 봄인지는 모르겠지만.

굿바이 2010-03-03 13:23   댓글달기 | URL
우쨔쓰까잉!

아렌트가 그랬니? [무사유]가 악이라고. 필연적으로 연대되어 있는 관계들인데, 참....

봄이 봄인지 실은 나도 모르겠지만, 희망을 처방전으로 깨어있을 수 있는 날들이 얼마나 더 남아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내 조카가 입학을 하고, 또 내 조카들이 부딪쳐야하는 구조적 폭력들이 엄연히 보이는데, 이모에게 봄을 묻는 아이들에게, 이미지로서의 봄도 봄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