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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사회학
김홍중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이 글은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의 제1부 <마음의 레짐: 진정성의 운명>에 대한 간략한 비평만을 담고 있다[그 중에서도 특히 제1장과 3장에 한정해서].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1) 1부는 이 책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머지 부분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2) 개인적으로 2부와 3부에 실린 글들은 이미 읽은 터라서 따로 비평을 할 필요가 없다. 3) 그리고 2부와 3부의 내용들은 일반인들이 소화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 없지 않다. 따라서 대중들이 그 글들을 읽고, 소통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하에서 이 책 1부의 핵심 개념과 내용인 <마음의 레짐과 진정성>과 <스노보크라시>에 대한 간략한 비평을 시도하고자 한다.
<마음의 레짐>은 이 책 1부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개념이다. 김홍중은 뒤르켐의 <집합표상>, 베버의 <정신>, 푸코의 <에토스>, 아날학파의 <집합적 심성>(망탈리떼), 윌리암스의 <정서구조> 등을 <마음의 레짐>에 연관되는 사회학적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이 개념들은 모두 사회적 행위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암묵적이고 집합적인 정서적 특질을 지닌 것들로, 그가 <마음>이라고 지칭하는 것에 공통적으로 묶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는 이 <마음>이라는 개념이 사회적 행위자들의 습관화된 행동패턴을 지도하며 사회적 행위의 조형에 영향을 끼치는 구조화된 시스템인 <레짐>과 접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화학적 결과물은 <마음의 레짐>이라는 개념으로 제안된다. 김홍중은 이 <마음의 레짐>이라는 개념이 푸코의 '장치dispositif' 개념에 상응한다고 주장한다[이에 대해서는 주석 1)을 참조]. 그리고 진정성을 <주체화의 장치로 기능하는 마음의 레짐>으로 정의한다. 이때 그것은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수준에서 주체들의 삶의 형식들을 조형하는 힘이자, 구조이다(24~5). 그는 티릴링을 따라서 전근대적인 신실성과 근대적인 진정성을 구분하는데, 이때 진정성이란 "개인주의적 가치를 내면화한 근대적 인간이 공동체로부터 주어지는 역할 모델과 자신의 '진정한' 욕망 사이에 괴리를 발견하고 이를 주체적으로 극복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이상이다."(26) 또한 진정성은 "자신의 참된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로막는 사회적 힘과의 대립을 마다하지 않는 태도이며, 이런 과정에서 진정성의 주체는 소위 '불행한 의식'을 갖고 있는 주체성을 형성시킨다."(26)
한편, "진정성은 '진정한 나'를 추구하는 자아정치, '진정한 사회'를 추구하는 현실정치가 결합해야만 하나의 레짐으로 현실화된다."(29) 한국 사회에서 그것은 80년대의 '민주화' 과정에서의 사회 전체의 구조적 변동을 야기하고 집합행동과 가치의 체계로서 구조화되는데, 그것은 소위 '386세대'라는 주체들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다. 김홍중이 볼 때, "그들은 경제적 발전의 수혜 속에서 삶의 의미를 추구할 수있는 여건을 통해서, 진정한 나를 추구하는 태도를 본격화한 세대이자,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집합적 연대를 체계적, 장기적으로 시도한 세대이다."(30) 진정성의 레짐은 "386세대를 정치적, 문화적, 도덕적 주체로서 생산해내는데, 그것은 민주화 시대를 관통하는 '규범적 우세종'으로 기능하게 된다[주석 2)를 참조]. 그러나 진정성의 레짐은 일부의 삶의 지향에 머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홍중은 "그것은 소수의 운동이 사회 전체의 흐름을 유도, 규정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386세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진정성의 가치는 당대 한국 사회의 규범적 지평을 규정하는 가장 지배적인 '마음의 레짐'으로 자리잡게 된다."(30~31)고 주장한다. 그런데 진정성의 레짐은 1) 주체 2) 내면 3) 공적 지평이라는 세 가지 구성요소로 되면서, 하나의 <이념형>(ideal type)으로 형성된다. 그것은 "윤리적 성찰에서 시작되어 이러한 도덕적 압력에 이르러 하나의 완결된 원환으로 닫히게 된다. 진정성을 추구하는 주체는 윤리적 성찰과 도덕적 압력의 이중 동력에 의해, 성찰적인 동시에 참여적인 주체로서 형성된다. 그 이상적인 형태에 있어 진정성의 주체는 그리하여,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고도의 윤리적 반성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또한 공적 영역과의 관계를 설정함에 있어서 그는, 공공의 문제가 실천을 요구할 때 이 실천의 영역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삶의 추구를 완성시키고자 한다."(34~5)
하지만 진정성은 <폭력적 경향>과 <요절> 등의 한계를 지니기도 한다. 전자는 "도덕적 진정성과 윤리적 진정성의 절묘한 결합으로 구축된 '진정성의 레짐'이 언제든지 양자의 분리로 인해서 와해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불안한 체제"(37)라는 것으로 현시된다. 후자는 "진정성의 논리가 치욕적인 삶과 불후의죽음 사이에 선택지를 강요한다. 그리고 불후의 죽음을 통한 상징적 생명의 확보를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설정하는 것"(39)으로 현시된다. 이 두 가지 한계로 인해서 윤리적 성찰, 도덕적 참여에의 강제, 그리고 그것을 통한 공적 지평으로의 나아감이라는 구조적 행위 패턴으로 특징지어지는 진정성의 레짐은 매우 이상적이고, 드문 형태로 존재할 뿐더러, 불안하기까지 한다. 그것은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내포하고 있는 불안정하고, 이상적인 체제로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적어도 97년 IMF 경제위기 전까지는 존속하였던 것 이다. 그것은 요절이라는 숭고하고 아우라적인 죽음[진정성의 실천으로서]과 살아남은 치욕적이고 부끄러운 삶 사이의 선택을 강요한다. 이와는 달리 97년 체제 혹은 포스트-진정성의 체제는 그 <진정성의 레짐>이 와해되고, 파괴되고, 균열되었을 때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김홍중은 "97년 체제의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그 자체로 얼마나 어렵고 긴절한 과제였던가를 아프게 역설하는 동시에, 생존을 위한 그 절박한 몸짓들이 이제 사회적 규범과 분리되어 '자연화'되고 있다는 사실, 진정성 레짐이 내적으로 통합되고 있던 사적 세계와 공적 세계, 윤리적 성찰과 도덕적 규범, 내성과 참여가 각각 분리되어 자율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42)고 본다.
이상이 제1장 <진정성의 기원과 구조>에 관련된 내용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서 두 가지 근본적 비판을 가하고자 한다. 하나는 그의 <마음의 레짐>이라는 개념이 가진 문제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의 실제적 적용이 가진 사회학적 효용성에 관한 것이다.
김홍중이 제시한 <마음의 레짐>이라는 개념은 분명 독창적인 측면이 있긴 하다. 하지만 우리가 볼 때 그는 이 개념을 너무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그는 이 개념이 뒤르켐이 『사회적 방법의 규칙들』에서 제시한 <사회적 사실> 혹은 <사회적인 것>에 상당한다고 말한다. 뒤르켐이 이 책에서 제시한 것은 오늘날 사회학에서 <구조>라고 말한 것에 상응한다. 뒤르켐은 이 책에서 <사회적인 것>이 사유양식, 행위양식, 감정의양식의 집합적 표상으로 의식적 차원에서 생산, 재생산, 전승되는 역사적 메커니즘을 강조한다. 김홍중은 뒤르켐이 여기서 특히 <감정양식>의 차원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면서, 그것의 실례로 사회심리학적인 측면에서의 군중의 집합적 심리행동에 큰 방점을 두고있다고 본다. 하지만 뒤르켐의 이 책에서의 군중의 사회심리학적 집합행동에 대한 태도는 다소 유보적이다. 그리고 그는 사회에 존재하는 세 가지 집합적 양식(집합적 표상)의 차원들에서 어느 하나에 방점을 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이 집합적 표상으로 물화된 것이 개인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면서 가지는 물질적 힘을 강조하는 것에 전력한다. 김홍중은 뒤르켐의 <사회적인 것>이 자신의 <마음의 레짐>과 적절히 상응할 수 있다고 판단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다. 『사회적 방법의 규칙들』에서 전자는 매우 심하게 닫힌 체계로 그려지고 있는 반면에, 후자는 매우 유동적이고, 개방적이고, 열려있는 체계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사회적 방법의 규칙들』에서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더욱이 김홍중은 자신의 <마음의 레짐>이 뒤르켐의 <사회적인 것>과, 푸코의 <장치>와, 베버의 <에토스>[특히 『신교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나타나는 주체의 미학화라는 테마]가 서로 상호적으로 상응한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간주하지 않는다. 적어도 푸코의 <장치>나 베버의 에토스가 권력의 미시물리학적 다이어그램[혹은 들뢰즈 식으로 말해서 배치]에 어느 정도 호응할 수 있다고 본다면, 뒤르켐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하나 덧붙인다면, 베버의 <에토스>는 <마음의 레짐>에 상응하기에는 행위자의 정신[김홍중의 <마음>에 상당하는]의 측면에 대한 방점이 가진 힘이 너무 크고, 뒤르켐은 정확히 그 반대다. 푸코의 <장치>가 물질적인 것[비담론형성체]과 비물질적인 것[담론형성체]의 사건적 배치를 통해서 객관적 선험적 장(場)을 형성하는 것[거기서 주체는 생산된다.]의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베버의 <에토스>와 뒤르켐의 <사회적인 것>이 그러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 우리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김홍중의 해석이 더 큰 문제를 지니고 있는 것은 그가 <마음의 레짐>이 푸코의 <장치>에 상응한다면, 그가 제시하고 있는 <진정성의 시대>로서 8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사회구조적 변동[즉 <마음의 레짐>에서의 구조적 변동]을 비물질적 측면과 물질적 측면 모두에 걸쳐 증명했어야 한다. 그의 <마음의 레짐>은 이념형적으로 그것을 그려내고있지만, 실제적 분석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사실 베버의 <에토스>도 하나의 <이념형>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면, 그것은 논리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한 해석학적, 문화과학적 보충이 시도된다. 김홍중이 그것을 시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현실에 대한 분석에서의 결과물은 그렇지 못하다. 즉 <마음의 레짐>이 다루는 현실은 이념형적으로는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의 배치로서의 <마음의 레짐>을 다루고자 하지만, 실제적 분석의 효과는 비물질적인 것의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베버가 『신교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정신[관념적인 것]과 충동[물질적인 것] 사이의 실천적 투쟁의 양상들을 분석하지만, 결국 정신의 충동에의 우위를 결정짓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한다면 김홍중의 <마음의 레짐>은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의 배치에서의 실천적 투쟁을 인정하고 있는 듯하지만, 거기서 강조되는 것은 진정성[혹은 마음의 레짐]의 정신적[관념적] 측면만이다.
이는 이른바 <386세대>에 대한 그의 <세대론적 옹호의 과잉>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아마도 그는 <386세대>가 그가 <마음의 레짐>의 이념형으로 설정한 것에 가장 가깝다고 간주한다. 이러한 설명은 그의 논리적 체계 내에서 두 가지 문제점을 드러낸다. 1) 그의 <마음의 레짐>은 뒤르켐의 <사회적인 것>이 가진 일반성에 상당하는 것이 아닌 독특성을 가진 것으로서 규정된다. 그가 주장하는 <마음의 레짐>으로서의 진정성은 사회적인 것의 일반성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규범적 우세종>만의 독특성에 한정된다. 따라서 80년대가 일반적인 수준에서 <진정성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히 틀린 말이다. 그 시대는 오직 <규범적 우세종>만의 독특성에 한정될 때만 <진정성의 시대>라고 규정될 수 있다. 2) 이런 논리가 현실에 대한 해석학적 분석의 결과에 관철된다면 더 큰 문제가 발생된다. 즉 80년대라는 <혁명이라는 실재에의 순수한 열정>에 다가가고자 하는 욕망의 시대에 대한 전유는 오직 <진정성의 시대>를 자기의 시대로만 전유하고자 하는 <386세대>의 욕망의 전유에 다름 아닌 것으로 규정되어버린다. 쉽게 말한다면 <진정성의 시대>로서의 80년대는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행위자들 일반에게 한정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386세대>라는 <규범적 우세종>에게만 한정되는 것이고, 김홍중의 <마음의 레짐>이 해석하고 있는 영역도 정확히 여기에만, 할당되고, 한정되어 설명된다. 이런 주장은 자연스럽게 <87년 체제>가 오직 <규범적 우세종>으로서의 <386세대>만의 것이라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물론 김홍중은 <마음의 레짐>이 가진 한계적 측면을 강조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 한계도 <386세대>만의 전유의 나머지 집합에서만 발생하는것이다. 그의 <마음의 레짐>에는 <386세대> 이외의 해당하는 집합적 영역은 고려되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는 80년대라는 <혁명이라는 실재에의 순수한 열정>에 다가가고자 하는 욕망의 시대에 대한 전유가 오직 <386세대>라는 규범적 우세종에게만 한정되는 것처럼 해석하는 김홍중의 주장이 지나친 <386세대>에 대한 그의 <세대론적 옹호의 과잉>의 한 단면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지워버릴 수 없다. 이로써 그는 <87년 체제>의 긍정성을 <386세대> 스스로 말살시킬 수 있도록 하는 이론적인 해석의 자원을 제공한다. 하여 그가 설정한 목표(telos)는 정확히 의도한 것과 정반대로 나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386세대>들이 현실의 수준에서 그렇게 행위한 것이 아닌가?
80년대를 진정성의 시대로 규정하면서, 그것이 오직 <386세대>라는 <규범적 우세종>에게만 한정되는 것임을 해석학적, 문화과학적으로 강변하는 것의 의도하지 않는 아이러니에 직면한 김홍중은 이른바 <97년 체제>라고 명명되는 <스노보크라시> 시대에 대한 그의 설명에서 또 한 번의 아이러니에 직면한다. <이중의 아이러니>가 그의 주장에서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그는 <87년 체제>와 <97년 체제> 사이에서의 한국의 사회구조적 변동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이 곧장, 전자에서 후자로 나아간다.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386세대>라는 <규범적 우세종>이 가진 <중심기표>가 가진 역량의 우월성에 대한 그의 강조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그것의 무조건적 우월성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것이 펼쳐지는 논리를 비판하기 위해서 다음의 단계를 밟아야 한다.
김홍중에게 <97년 체제>는 포스트-진정성의 시대이자, <스노보크라시>의 시대이다. 그에 따르면 "<스노보크라시>는 이중의 지배체계이다. 1) 그것은 스노비즘으로 무장한 도구적 성찰성의 주체들이 한국사회의 확고한 지배층으로 부상하는 과정이다. 2) <스노보크라시>는 거시적 통치성뿐 아니라 자아의 통치에 연관된다. 즉 서동진 식으로 말한다면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스놉으로 생산되는 것이다. 김홍중은 <스노보크라시>의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들이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시한 <악의 평범성> 개념을 비틀어 <악의 속물성>이라는 규범적 예속성에 붙들려있다고 비판한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 슬라보예 지젝이 "칸트와 함께 사드를"로써 표현한 법이라는 초자아[대타자]의 외설적 쾌락[너의 향락을 즐겨라!]이 가진 무시무시한 폭력성을 폭로한 것에 상응한다[지젝은 이를 유대인들의 인종청소라는 인종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예증한다]. 김홍중에 따르면 <스노보크라시>의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들로서의 스놉들은 살아 있는 시체인 좀비 그 자체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김홍중이 제안하는 대안은 <스노보크라시>의 시대에 작동하는 스노비즘적 규범의 예속성에 균열을 내는 윤리적이고, 성찰적인 주체의 역량에의 긍정이다. 이는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의 자동인형적 행동이 그의 무사유성에서 비롯되었음을 비판하면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대안으로 <사유하는 인간>[이는 <정치적 인간>으로 다른 책에서도 제시된다.]이 가진 고귀함을 강조하는 것과 같다. 김홍중은 아이히만이 매우 높은 수준의 <도구적 성찰성>을 가진 규범적으로 예속화된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규정하면서, 그 대안으로 <윤리적 인간>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이러한 주장에 이르기까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너무도 많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핵심적인 것은 다음의 네 가지다.
1) 김홍중은 도대체 왜 <97년 체제>[=포스트-진정성의 시대=<스노보크라시>의 시대]가 도래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전혀 시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386세대>라는 <규범적 우세종>에게만 한정되는 <마음의 레짐>이라는 이념형에 근접한 모델은 가치론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 따라서 <97년 체제>에서의 스놉들의 삶의 형식들은 가치론적으로 나쁜 것이 된다. 하지만 그것이 왜 도래했는가? 누가 그것을 도래하게 했는가? 에 대한 설명은 전혀 시도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외치고 싶어진다. 사실 <97년 체제>가 도래하게 된 것의 가장 큰 책임이 <386세대>라는 <규범적 우세종>에게 있는 것 아닌가? 이것을 부정할 수 있는가? <386세대>라는 <규범적 우세종>이 <87년 체제>의 긍정적 측면만을 전유하면서, 그 이후의 사회구조에서 발생하는 부정적 효과들을 가치론적으로 이분법화하면서 비판하는 것은 과연 윤리적으로 옳은 태도인가?
2) 김홍중이 주장하는 포스트-진정성의 시대에서의 윤리적 주체의 역량에 의해서 구성될 <좋은 삶의 형식>이 그가 설정한 <마음의 레짐>의 이념형에 근접한 것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일종의 이분법적 가치론에 입각한 구별짓기의 부정적 몸짓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 아닌가? 시쳇말로 그것은 아렌트가 '좋은 정치' 혹은 '좋은 삶'을 긍정하면서 폴리스와 오이코스를 가치론적으로 구별짓기한 것, 즉 노예와 시민의 정치를 둘러싼 투쟁에서 전자의 정치에의 자격을 박탈하고, 후자만의 정치에의 자격을 부여한 것과 다를 바가 뭐가 있는가? 아렌트에게 있어 오이코스의 영역이 폴리스의 영역과 가치론적으로 구별된다고 한다면, 김홍중에게 있어 그것은 스노보크라시의 물질적인 것에의 순수한 열정에의 포획[스노비즘의 규범적 체계에의 예속화]과 그것으로부터의 윤리적 주체의 탈주를 가치론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여기서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스놉, 스노보크라시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생산되었으며,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이다. 김홍중은 이 측면을 의도적으로 간과한다. 그가 말하는 스노보크라시에 저항하는 윤리적 주체의 생산은 이 문제에 대한 해결 없이는 결코 이룩될 수 없다.
3) 김홍중의 주장이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스노보크라시에 저항하는 윤리적 주체가 누가 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직면했을 때이다. 그 주체는 <진정성의 시대>를 전유한 <386세대>라는 <규범적 우세종> 가운데서, 이른바 <가짜 규범적 우세종>[주석 3)을 참조]을 제외한 영역에서 생산된다. 김홍중의 글을 찬찬히 읽다보면 그런 윤리적 주체가 속할 수 있는 집합적 영역은 극히 희미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4) 김홍중은 <80년대의 진정성>을 80년대 사회구조에서의 일반적 특성이 아닌, 독특성의 측면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는 <97년 체제의 속물성>을 일반적 특성으로 규정하면서, 여전히 거기서 전복적 주체의 윤리적인 실천의 가능성의 독특성을 보고자 한다. 그런데 그는 우리시대의 경제적인 특질들을 모두 속물성으로 일반화시켜 버리고 있지는 않는가? 이건 지나친 사회학적 일반화가 가진 위험성의 함정이 아닌가? 그러면서 그는 그 일반성으로부터 탈주하기 위해서 윤리적 주체를 요청하는 것, 즉 독특성을 요청하는 것에 매달리고 있지 않는가? 문화사회학자로서의 그의 이러한 해석학적 지향은 이른바 좋았던 옛시절을 그리워하는 그의 자발적 기억에의 경도의 발로가 아닌가? 이는 아렌트와 아감벤이 정치적 측면에서의 고대 그리스에로의 기원적 회귀를 열망하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즉 그는 <마음의 레짐>이라는 이념형에로의 회귀를 열망하는, 즉 <386세대>라는 <규범적 우세종>에게만 한정되는 진정성의 시대로의 열망을 시도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런데 이는 스스로가 386세대>라는 <규범적 우세종>인 그 김홍중이 자기자신게 거는 사회학적 최면이 아니고서 무엇이겠는가?
결론적으로 우리는 김홍중의 <마음의 레짐>에서 80년대를 자신들만의 <진정성의 시대>로 전유한 <386세대>라는 <규범적 우세종>에 대한 아직까지 살아남은 386세대들의 도덕적 자기최면의 마지막 그림자가 드리워있음을 보게 된다. 이른바 스노보크라시의 시대에 살아남은 그들에게 남은 것은 <가짜 규범적 우세종>의 은폐적 자기행위의 어두운 이면일 뿐이다. 그들은 스노보크라시의 시대에 윤리적 주체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하지만, 그들은 도덕주의의 예속화가 과잉적 형태로 전락했을 때 어떤 유형의 주체가 탄생되는지를 스스로 보여주고자 하는 자들일 뿐이다. 그들에게서 스노보크라시의 시대에 맞서는 윤리적 주체의 탄생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김홍중이 말하는 그런 윤리적 주체는 누가 될 수 있으며, 어떻게 될 수 있을까? 우리 스스로도 구체적 대안을 낼 수 는 없다. 하지만 그 가능성을 <386세대>라는 <규범적 우세종>에게서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이 민주화 20년의 비극적 결과가 아니고서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따라서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은 스노보크라시의 시대에 진정성의 시대의 마지막 생존자가 쓰는 슬픈 연서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김홍중은 자기 스스로를 최후의 인간으로 규정하는가?
주석 1) 하지만 우리가 볼 때 그는 푸코의 '장치' 개념을 너무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가 이 개념을 처음 제안했을 때는 1977년의 한 인터뷰에서였는데, 그때 그의 관심은 지식-권력의 네트워크에 의한 근대적 주체생산의 메커니즘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규명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김홍중은 자신의 <마음의 레짐>이 후기 푸코의 존재미학적 주체의 윤리적이고, 성찰적인 행위양식으로서의 에토스에 상응하는 한편, '장치'에 상응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마음의 레짐>이 푸코의 사상과 이론을 자신의 논의에 맞게 재구성했다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푸코였다면] 장치에 의해서 주체가 자신의 행위양식들을 형성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특정한 사회에서의 구조화된 행위양식의 패턴으로서의 레짐화로 귀결된다고 주장했을까? 그는 은연중에 푸코의 존재미학을 사회학적 일반화로 귀결시켜버린다. 폴 벤느가 볼 때 푸코의 존재미학적이고 윤리적인 주체로서의 자기배려하는 주체는 베버의 청교도적 에토스를 실천윤리적인 행위양식으로 구성해내는 주체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코는 그것을 애써 부정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베버사회학(주의)에 내재된 보편주의(혹은 일반화)의 함정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다.
주석 2) 하지만 김홍중은 진정성이 규범적 우세종으로 이해될 때, 그 시대 모든 구성원들이 진정성이라는 마음의 레짐에 구속되어 있었다거나, 당대에는 오직 진정성이라는 마음의 레짐만이 존재했다는 오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본다.
주석 3) 이 개념은 우리가 김홍중의 글을 읽다가 만든 조어다. 김홍중은 "스스로 이미 속물적인 삶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면서 80년대적 진정성을 규범화하여 이를 통해 새로운 세대의 삶을 부정함으로써 스스로의 속물적 삶을 은폐하는 자들 또한 스놉이다."라고 말한다. 김홍중의 설명대로라면, 80년대적 진정성을 규범화할 수 있는 주체들은 집합론으로 볼 때 그리 많지 않다. <386세대>이외의 주체들은 제외되어야 한다. 그럼 이른바 90년대 학번 이후의 세대가 남게 되는데, 그들이 그가 말하는 80년대적 진정성을 규범화 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