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란 무엇인가 - 무위인無位人에 관하여 개념어총서 WHAT 5 
이정우 지음 / 그린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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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객관적 선험철학적 답변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령적 질문들의 끊임없는 괴롭힘에 시달린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즉 세계]에 대해서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세 가지 유령적 질문들은 각각 <존재론>, <인식론>, <윤리학>에 할당된다. 그것들은 각각 존재, 앎, 실천의 문제에 잇닿아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영역들에 할당된 세 가지 질문들을 공통적으로 묶어내는 끈이 있다. 그것은 <나>[주체]라는 것이다. <나>[주체]라는 것은 인간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존재자들 모두에게 들이닥치는 필연적인 숙제와 같다. 신(神)의 강권적 힘에 의해서 인간의 삶이 틀지워지던 중세까지도, 인간에 의한 주체에 대한 물음은 희미하게 존재하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자기 발로 서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물음을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인간은 신의 정원을 온전히 떠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주체에 대한 물음은 근대철학의 비조이었던 데카르트부터, 그것에 대한 물음 자체가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철학적 문제설정으로 철학자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지난한 문제였다. 그런 의미에서 "주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인간을 인간되게 함에 대한 근본적인 (불)가능성에 대한 문제제기다. 현대에 들어서 이 질문이 더 이상은 유효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되었을지라도 그것이 끈덕지게 살아남는 것은 무엇일까? 이정우의 『주체란 무엇인가?』는 바로 이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 씌어졌다. 그는 주체의 자유를 강하게 역설하는 철학보다는 다소의 결정론처럼 보이기는 해도 <객관적 선험철학 objective transcendental philosophy>[이는 객관적인 선험적 장에서 주체가 어떻게 생산되고, 거기서 주체는 어떻게 규정되며, 또 그런 만큼 어떤 주체가 가능할까를 고민하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라고 지칭하는 것을 통해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사유하고자 한다. 이 책은 <주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객관적 선험철학적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주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으로 <이름-자리로부터 탈주>[저자의 말대로 이를 단순히 이름-자리를 거부하거나, 벗어나고자 하거나, 부정하거나 하는 태도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것은 들뢰즈-가타리 식으로 말해 배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기존의 배치를 새롭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뜻한다.]하는 주체로서의 <가로지르는 주체> 혹은 <무위인 無位人>이라는 주체 개념을 제시한다. 이것은 이정우식 주체론에서의 <주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입장으로서, 그가 볼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체는 바로 <무위인>으로서의 주체이다. 이 책의 부제가 <무위인에 관하여>인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술어적 주체의 '너머'와 차이생성, 그리고 정체성의 문제

주체의 개념에서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술어적 주체>[주어로서의 주체인, 자신에게 붙은 술어들을 통해서 성립하는 주체]이다(14). 이 주체는 <나>라는 자기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술어들이 주체를 주체이게끔 하는 주체이며, 나[自]를 타[他]와 구분하는 것을 함축함으로써 성립하는 주체이다(17).  중요한 것은 술어적 주체를 구성하는 갖가지 규정들은 삶을 형성하는 각각의 범주들에서 추출됨으로써, 그리고 그렇게 추출된 규정성들이 계열화됨으로써 성립한다는 것이고, 그 나머지의 여집합은 부정된다는 것이다(20). 가령 "386세대는 ~이다"라고 할 때 이 규정성들의 묶음에 계열화되는 것들이 있고, 거기로부터 배제되는 것들로서의 부정되는 집합들이 있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나>는 나를 둘러싼 우주와 사회, 그리고 세계의 무수한 술어적 주체를 구성하는 계열들의 집합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물론 그 때 나를 규정하는 자아적 계열들의 집합으로서의 술어적 주체는 타자와의 변별적 차이[혹은 부정]의 구획점으로 존재한다. 이정우는 이를 <이름-자리들의 체계>라고 규정하면서, 그것이 아무-것도-아니라는 것[그것의 구속으로부터 언제든 탈주할 수 있을 만큼의 잠재성의 벡터가 극한에 이른 상태]에 대한 깨달음의 상태를 장자의 <만물제동>에 빗댄다(23). 이것은 아마도 들뢰즈-가타리 식의 <기관 없는 실체>를 의미할 터인데, 그것은 분절 자체의 무존재성인 동시에, 어떤 분절도 존재할 수 있다는 잠재성의 영역을 표지하는 것이다[다시 말한다면, 이러한 상태는 어떤 규정적인 <이름-자리>로부터 탈주하는 힘의 벡터의 극한 점에서 "나는  어떤 ~도 아니다."가 될 수도 있고, "나는 어떤 ~도 될 수 있다."도 될 수 있는 그런 상태를 지칭한다]. 그런데 이런 개인적 의식[자아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술어적 주체는 집합적 수준[우리]으로 나아가서 존재할 수도 있다. 그것은 <확장된 나>로서의 우리이다. 이정우는 여기서 <나>[개인]와 <우리>[사회] 사이의 구성과 해체의 이율배반적 관계가 존재한다고 본다.  

지금까지가 술어적 주체에 관한 공간적 지평의 탐색이었다. 그런데 술어적 주체는 또한 공간적 지평뿐 아니라 시간적 지평을 통해서 생각할 수 있다. 나라는 술어적 주체가 특정하게 정해진 시간에 배분되는 공간적 지평에서 <이름-자리>를 할당받는 것을 우리는 <이름-자리의 공간적 지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간이라는 선험적 지평과의 관계맺음을 통해서 변화한다. 즉 <이름-자리의 공간적 지평>으로부터의 탈주가 일어나는 셈이다. 이는 나라는 술어적 주체가 특정하게 정해진 시간에 배분되는 공간적 지평, 즉 <이름-자리>에서 그 바깥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33). 이것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름-자리> 주체의 변동/변화/생성을 시간이라는 선험적 지평을 통해서 사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체는 결코 고정적이거나 단일한 것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항상 사이(-), 변화, 생성, 과정 중에 있는 주체, ~로 되어가는 주체가 문제가 된다[들뢰즈의 <사건의 철학>에서 문제인 것은 항상 생성의 철학이다. 그것은 차이나는 것의 반복으로서의 영원회귀를 존재의 일의성의 테제로 사유하는 철학, 즉 주사위 놀이를 하는 철학이다. 이러한 사건적 철학에서의 주체는 특이존재, 즉 일반성이나 특수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특이존재로서의 주체를 사유할 수 있게 한다. 하여 들뢰즈 철학에, 더 나아가 포스트구조주의에 주체론이 부재하다고 비난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우리는 언제나 <정체성의 구축>이라는 문제설정에 직면한다. 왜냐하면 주체가 주체로서 구성될 수 있는 것은 그 정체성의 구축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주체가 동일성을 완전히 거부해 버릴 때, 그 주체는 주체일 수 없다[지젝이 실재와 상징계 사이의 틈에서 주체가 구성된다고 말한 것은 정확히 이 대목에서다]. 하지만 주체는 시간에서의 끊임없는 변화를 긍정할 때, 즉 시간의 선험적 지평 속에서 끊임없는 생성하는 차이들을 겪어낼 때[즉 차이생성하는 그 경험을 경험할 때] 주체로서 성립한다(37~8). 그러한 주체는 이전의 자신에게 부여된 낡은 <이름-자리>에 고정되거나 단일한 상태로 머물러있는 주체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일시적인 어떤 동일성의 틀[들뢰즈 식으로 말한다면 수동적 묶어내기. 이에 대해서는 『차이와 반복』을 참조]에 묶이게 된다. <이름-자리 주체>의 선험적인 시간적 지평에서의 종합은 두 가지 수동적 종합, 즉 생명체의 자기보존을 위한 종합으로서의 동일성[코나투스의 욕망]과 사회적 동일성[사회학에서 말하는 사회화]을 필수적으로 수반한다. 이것은 <나>[주체]와 <나>가 속한 사회 속에서 주체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수동적 조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사건들의 열린 총체를 가로지르면서 생성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43)인 주체성으로서 성립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주체가 그 수동적 조건들에 완전히 붙들려있거나 포획될 때 그것은 전적인 예속화/죽음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건들의 열린 총체를 가로지르면서 생성하는 주체/주체성은 독단적 주체성이 아니라, 항상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객관적인 선험적 장[빈위들/사건들의 총체]이 형성하는 객체성과의 마주침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이정우는 이를 <주체성과 객체성의 이율배반적인 마주침의 시간적/공간적 특질>(46~7)로 간주한다. 주체는 자기를 규정하는 객관적인 선험적 장 안에 던져진 존재자, 즉 <이름-자리>를 부여받은 존재자이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탈주하려는 존재자이다. 다시 말한다면 "시간 속에서 변이해 가는 뫼비우스적 이율배반적 구조에서 주체는 규정되는 존재인 동시에 규정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존재이다. [...] 자기를 만들어 가는 주체는 자신의 이름-자리를 스스로 만들어 가려 한다. 주체-되기는 곧 이름-자리와의 투쟁, 술어적 주체와의 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52~3)  이것은 푸코가 <진실>과 그것에 대한 역사적 <변이형>이라고 말한 것에 다름 아니다. 특정한 시대의 에피스테메에 속한 주체들은 그 시대의 이율배반적 구조의 금붕어들이지만, 그 시대와의 적극적 투쟁을 통해서,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특이존재자들[이름-자리의 바깥으로 나아가는 자들]로서 자신의 주체성을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주체들일 수 있다. 물론 그런 주체들은 기존의 지배권력의 규정들, 예속화의 장치들인 'doxa'로부터 탈주하는 'para-doxa'의 존재자들로 살아가는 존재자들이다[독사와 파라독사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는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를 참조].   

  

주체성과 타자성의 이율배반성, 그리고 <되기>의 문제

그런데 주체/주체성은 항상 타자/타자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내가 주체로 서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객체로 만들어야 한다. 즉 내가 주체화된다는 것은 누군가가 객체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너의 관계는 끊임없는 술어적 주체의 관계의 그물망으로 직조된 관계이므로,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객체화[그 과정은 곧 주체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주체화와 객체화의 이율배반적 특성의 극한은 "내가 살기위해 누군가를 죽여야만 한다."는 신자유주의적 시장법칙에서 잘 발견된다]. 이런 상황에서 나[또는 우리]는 스스로 서기 위해서 항상 누군가[또다른 우리]와 무한한 투쟁적 관계[주체화/객체화]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원래 주체를 의미하는 어원인 <sub-jectum>(서브-젝튬: subject)에는 이런 이중적 의미('아래로 던져진 것'이자 '주체')가 깃들어 있다(77). 이중적인 체인 <sub-jectum>은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직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주체> 개념에는 내가 주체로서 독립적으로 설 수 있는 주체성과 그 과정에서의 타자와 맺는 관계를 함축하는 타자성의 관계론적 특질을 필연적으로 내포한다. 현실(the real)에서 나는 주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으며, 그런 만큼 또 다른 나(타자)도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타자가 주체로 서고자 하는 욕망인 <타자의 주체성>, 즉 <타자성>을 의미한다. 이는 주체성 없는 타자성은 없고, 타자성 없는 주체성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입장에서 타자의 주체성은 나의 주체성의 성립의 과정에서 타자를 객관화(예속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이는 타자의 입장도 동일한다. 따라서 주체성과 타자성의 교차적 지점에서는 긴장과 갈등의 관계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헤겔이 말한 <인정욕망>이나 호네트가 말한 <인정투쟁>이 바로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나의 주체성과 너의 타자성의 관계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나의 주체화와 너의 객체화의 관계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다름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주체화가 타자 없는[주체의 타자의 객체가 극단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경우와, 그 반대의 경우의 관계설정도 함축한다. 내가 온전한 주체로 서기 위해서는 나라는 자기고립적 주체로만을 상정해서는 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은 항상 타자와의 관계설정을 고려해야만 한다[따라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적 주체는 절대 성립할 수 없다. 그것은 항상 타자와의 관계를 필연적으로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주체 앞에 놓여진 객관적 상황이라고 해도 좋고, 주체들의 집합체로서의 우리 앞에 놓여진 개관적 상황이라고 해도 좋다. 가령 내가 내 앞에 놓인 객관적 상황에 절대 굴복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로 점철된 나머지 나의 주체화의 밝은 빛으로 그 상황을 어떠한 여백도 없이 채운다고 가정해보자. 그 때 나의 주체화는 온전한 빛으로만 구성되지만, 거기엔 어떤 타자에 대한 배려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강한 권력에의 의지[욕망]이 담겨있다. 이정우는 그런 그릇된 주체화의 욕망을 일본의 니시다 기타로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그에게 "주체화란 빛의 형상인데, 그것은 자신을 짓누르는 객관적 상황에 굴복하지않고 그 상황을 주체 안에 녹여 넣음으로써 주체는 자신을 보존하고 확중한다.  그 극단적 경우는 주체가 겪는 한순간의 '생명사건'을 이데아와 결합시키는 경우이다."(83) 니시다의 철학이 자신 앞에 놓여진 객관적 상황[소여된 것]을 수동적으로 매몰되기 보다는 능동적으로 주체에 몰아넣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은 바로 그런 경우다. 가령 일본이 서구[미국]에 의해 객관화된 것을 경험한 이후, 자신앞에 놓여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객관적 상황[소여된 것]에 수동적으로 매몰되기 보다 능동적으로 주체화의 형상에 녹여내는 것. 니시다 철학이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일본이 직면한 역사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대동아공영권[능동적 주체화의 극단적 양식으로 한국과 아시아를 극단적으로 객체화하는 것]을 주장하는 데 왜곡되어 활용된 것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니시다의 철학과 그것의 왜곡은 차이의 체계=동일성의 체계로 환원되는 것의 이미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차이의 철학[동일성으로 회귀/환원되는]이 아니라 차이생성의 철학[동일성으로 회귀/환원되지 않는]을 확립하는 것이 문제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가 『천 개의 고원』에서 말했던 <되기>[=becoming, 생성]의 문제이다. 이정우는 "차이생성하는 타자들 사이에서의 미분적 되기(dAdB의 미분적 관계)가 곧 타자-되기라고 할 수 있다. 이 타자-되기가 모든 윤리적 행위의 존재론적 근거다."(87)라고 말한다. 들뢰즈-가타리에게 <되기>란 A와 B가 어느 하나로 귀속됨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마주하고, 특정한 관계 속에 들어감으로써, 자신이 서로 가지고 있던 배치의 양상을 바꾸는 것이다. 즉 함께 연속적인 변이에의 경험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주체와 타자의 관계설정이 전자로 귀속되는 주체화, 후자로 귀속되는 객체화가 아니다. <되기>는 주체와 타자 모두가 함께 변이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되기> 혹은 무위인의 윤리학과 계열학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체화∞객체화의 관계설정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설정하는 <우리-되기>의 문제를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내가 객체화되지도 않고, 타자가 객체화되지도 않는 그런 진정한 주체[론]을 확립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 문제가 해결될 때에만 <우리-되기>를 통해 <공통적인 것>의 구성을 통해서 기존의 상징계에서의 배치를 역전시켜 혁명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도래할 민중>의 <도래할 혁명>이자 <도래할 민주주의>인 것이다. 이에 대해 이정우는 "저항 주체들이 서로에게 그늘을 만들기보다는 전체로서의 저항을 생각하면서 상생의 관계를 맺을 때에만 진정한 '우리'-되기가 성립할 수 있다."(99)고 말한다. 왜냐하면 단순히 <이름-자리>의 형식적 차원에서의 바꿈(이합집산)으로만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혁명을 이루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기존의 낡은 <이름-자리>의 실질적 전복을 이루어내는 것, 즉 기존의 낡은 <이름-자리>의 바깥으로 나아가는 것[혁명]이다. 이정우는 이를 <무위인의 윤리학>이라고 말한다. 즉 "무위인이란 이런 위[<이름-자리>]를 가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이런 위의 경계들을 가로지르면서 이-것들을 창조해 내는 사람이다. 이-것들의 창조는 타자들 사이에서의 '되기'를 전제하며, 타자-되기, 숱한 형태의 '우리'-되기를 통해서 가능하며, 때문에 존재론적 행위인 동시에 윤리적 행위이기도 하다."(100) 
 

이 작지만 알찬 책을 통해서 우리는 "주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우리의 삶과 생명, 그리고 사회생활 전체, 더 나아가 국제적, 전 지구적 관계에 대한 존재론적, 윤리적, 인식론적 문제설정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한 주체로서 세우면서도, 타자를 객관화시키지 않는 방향으로서의 주체를 어떻게 구성해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그것은 비단 우리 자신의 개인적 삶뿐만 아니라 사회, 전 세계에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책은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중요한 참조점을 제공한다.




 
 
 

최근에 나온 책들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들을 몇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서 정리하고자 한다. 이 신간 열전은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사에 의거한 것이다.  

1. 정치학  

정치학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책들로는 손호철의『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와 박동천의『깨어있는 시민을 위한 정치학 특강』 을 꼽을 수 있다. 두 권의 책 모두 일간신문이나 인터넷 신문에 칼럼의 형태로 쓴 글들을 묶어낸 것이다. 손호철 교수는 최근의 <한국사회 체제논쟁>에서도 잘 나타났듯이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한계와 이명박 정권의 괴물적 탄생을 냉철하게 분석하고자 노력하고 있는데, 그 결실이 이 책에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이 책의 핵심은 "엠비식 우파 신자유주의뿐만 아니라, 김대중·노무현식 좌파 신자유주의도 넘어서야 한다. 기존 정치세력이나 정파들이 연대하는 상층부연합을 넘어, 민생을 중심으로 대중 속에서 ‘풀뿌리 복지연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에 있다(<한겨레>,2010.10.20). 박동천의 책은 프레시안의 연재기사로 실렸던 글들을 묶은 것인데, 한국사회의 정치적 프레임에 대한 근본적이고, 도발적인 문제제기로 가득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도대체 왜 한국사회는 그토록 급격하게 우경화되었는가?"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이 문제의식에 답을 얻기 위해 한국사회에 자리잡고 있는 뿌리깊은 낡은 정치적 프레임 네 가지[‘마녀사냥’ ‘권력숭배’ ‘선견지명’ ‘집단생존’]의 실체를 고발한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결과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법과 정치에 있어서의 자유주의와 사회적 약자에의 배려로서의 사회주의의 화학적 결과물로서, 그 사상적 원천은 19세기의 밀과 20세기이 케인즈이다.]로 나타난다. 그는 그것이 가능하게 되기 위해서는 공론과 제도의 동시적 변동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박동천의 이런 주장은 대안없는 진보주의에 나름의 자극이 되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특히 최근 진보진영의 <체제논쟁>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지침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 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 ◇◇◇  

◇◇◇ 절차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 ◇◇◇

  
 

 

 

 

 

 

 

 

2. 철학[형이상학, 사회철학, 정치철학]

철학[사회철학, 정치철학, 미학]과 사회사상에서는 주목할 만한 책들이 꽤 나왔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레닌 재장전』(알랭 바디우 외, 이현우 외 공역, 마티, 2010),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강병호 외, 난장, 2010), 『니체』(하이데거, 길, 2010)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레닌 재장전』은 좌파에겐 여전히 중요한 질문인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요청하는 정치적 유령의 힘을 가진 존재로서의 레닌을 다시 불러내는 것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 책에서는 <레닌을 복구하기>, <철학에서의 레닌>, <전쟁과 제국주의>, <정치와 그 주체> 등 모두 네 개의 세부주제에서 이러한 물음을 확대 재생산한다. 그럼으로써 이 책은 <레닌을 현재화하기>라는 좌파의 시대적인 윤리적 요청에 부응하고자 한다. 이 요청에 바디우, 지젝, 네그리, 발리바르, 이글턴, 제임슨, 그리고 최근에 타계한 벤사이드 등 오늘날 전 세계의 내노라하는 일급 좌파지식인들은 레닌이라는 정치적 유령과의 투쟁을 통해서 응답한다.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은 강병호 외 7명의 젊은 연구자들이 우리 시대의 제1철학으로 부상하고 있는 정치철학의 세계적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정치철학자[르포르, 발리바르, 아감벤, 랑시에르, 호네트, 무페, 고진, 바디우] 8명에 대해서 쓴 안내서이다. 8명의 정치철학자들의 정치철학과 정치사상을 공통적으로 묶어내는 것은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이라는 개념이다. 이를 바탕으로 연구자들은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으로 묶여질 수 있는, 그들의 정치철학과 정치사상을 통해서, 우리가 발을 딛고 선 '지금 여기'의 시/공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유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한다. 이런 연구자들의 바람이 대중들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개인적으로 아쉬운 점 한 가지는 지젝과 네그리의 정치철학에 대한 소개가 빠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언급한 사상가들 중에서 클로드 르포르가 어떻게 소개되었을까 궁금하다. 르포느는 현대 민주주의론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사상가로 그가 제시한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이후 정치철학자들의 정치철학적 사유의 전개에 있어서 불가피한 준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저작은 국내에 단 한 권도 번역이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르포르의『정치적인 것에 관한 시론』이 그린비에서 <프리즘 총서>로 나온다는 것이다. 곧 그의 사상에 대한 밑그림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 프리즘 총서 ◇◇◇  

 

하이데거의 『니체』(하이데거, 길, 2010)는 아마도 상반기 번역서 가운데 가장 핫(hot)한 작품이 될 것이다[번역 및 출간 소식은 내 페이퍼 http://blog.aladdin.co.kr/booktopia/3397768에서 다루었다]. 서양철학사에서 하이데거 이전에 니체는 거의 시인이나 문학자로 알려졌다. 그런 니체를 비로소 형이상학자로 규정하고, 부활시킨 장본인이 바로 하이데거다.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에 주를 이루는 것은 <권력의지>와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다. 전자를 통해서 하이데거는 인간 및 존재하는 모든 것들[존재자들]의 근본적 성격을 규정하고자 하며, 후자는 전자의 존재형식에 상당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의 가운데 존재자들과 존재와의 관계를 논의하려는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적 도전이 시도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이데거는 이 두 가지 개념을 통해서 니체를 서양 형이상학의 파괴자가 아닌 완성자, 서양적인 니힐리즘의 극단을 완성한 형이상학자로서 규정한다. 우리는 이런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에서 두 가지 정도의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하나는 그가 니체의 자필유고만을 해석의 준거점으로 참조함으로써 의도적 왜곡을 낳을 가능성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그가 니체의 존재자들과 존재와의 관계를 <동일한 것의 반복으로서의 영원회귀>으로 해석함으로써 니체의 존재의 일의성을 왜곡했다는 점에 있다. 우리의 생각에 동일한 것들은 절대 반복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영원회귀 할 수도 없다. 차라리 차이나는 것들의 생성을 통한 반복만이 있고, 그것들만을 통해 영원회귀가 가능하다. 하여 이러한 <존재의 일의성> 테제는 하이데거가 존재자들과 존재와의 관계에서 후자의 특권[그리하여 그가설정한 어떤 <기원>으로 끊임없이 회귀하려는]을 강조하려는 그의 의지가 거짓된 것임을 폭로한다. 존재자들과 존재의 관계의 평등을 통해서만 <존재의 일의성> 테제는 성립할 수 있고, 바로 거기서 우리는 차이나는 것들의 생성으로서의 반복[차이와 반복]으로서의 영원회귀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다. 결국 니체는 하이데거가 해석한 것과 달리 서양 형이상학의 진정한 파괴자가 된다. 하지만 그 때의 파괴는 단순히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파괴적destructive 창조creation이다. 우리는 니체의 사유이미지에서 파괴적인 이미지만을 보려하지만, 그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파괴함으로써 창조하는 것 혹은 파괴를 통한 창조다.  

3. 미학, 사회사상

미학에서 가장 눈에 띄는 책은 알랭 바디우의 『비미학』(알랭 바디우 외, 장태순 역, 이학사, 2010)과 『오페라의 두 번째 죽음』(돌라르/지젝, 민음사, 2010), 이진경의 『역사의 공간』(이진경, 휴머니스트, 2010), 그리고 프랑스아 줄리앙의 『무미 예찬』(프랑수아 줄리앙, 최애리 역, 산책자, 2010)이다.
 


 

 

 

 

 

 

 

바디우의 책은 한국에 몇 권의 책이 띄엄띄엄 소개되고 있는데, 이 책은 그의 미학적 관심을 적극적으로 표명하기 시작하는 첫 신호탄이라고 한다. 불어의 원제를 그대로 해석하면 <비미학의 작은 매뉴얼> 정도가 되겠다. 알라딘[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1471295]에 이 책의 핵심적 내용이 잘 소개되어 있으니 참조하시길 바란다.  

한편, 랑시에르의 『미학 안의 불편함』은 바디우의 『비미학』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또한 비판하고 있으므로 같이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2부 <모더니즘의 모순들>에 실린 <알랭 바디우의 비미학: 모더니즘의 비틀림>에서 바디우의 <비미학> 테제를 예술의 모더니즘의 문제와 연결시켜 사유한다. 랑시에르는 거기서 바디우의 <비미학>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그것은 예술은 '고유성'과 예술의 동음이의를 다시 작동하게 만드는 것의 이름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반미학적 원한과 포스트모던의 어리석음과는 반대로 바디우의 글에서 예술사상에 대한 대한 모더니즘의 잇기를 다시 의문시하는 장소와 시간일 것이며, 예술의 식별과 예술의 동음이의에 대한 잘못된 증거들을 다시 생각하는 장소와 시간일 것이다."(141)    

 

 

 

 

 
 

  

 

슬로베니아 학파의 일원인 돌라르와 지젝이 의기투합해서 쓴 『오페라의 두 번째 죽음』은 오페라의 두 거장인 모차르트와 바그너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이다. 돌라르는 우리에게 지젝보다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다만 여러 학자들과 같이 쓴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에 그의 글 두 편이 실려있다. 이 책에 핵심적인 내용은 국내의 충실한 교조주의적 라캉/지젝주의자인 역자인 이성민의 글에 담겨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은 "지성적인 독자와 오페라 애호가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책인데, 한국에서 과연 그런 독자가 몇이나 될까 생각한다. 아마도 역자는 이 모든 영역에 자신이 속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 문구는 이제 지젝도 한국의 지성계에서 그렇게 <소비>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징환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진경의『역사의 공간』(이진경, 휴머니스트, 2010)은 출판사에서 이진경이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 최초로 쓴 저작이라고 대대적으로 광고를 하고 있는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의 5, 6, 7장은 이미 아래의 책에서 쓴 내용을 다시 수록한 것이므로 엄연히 말해서 최초로 쓴 것은 아니다. 그 이외의 내용들은 이 책을 위해 새롭게 씌어진 것들인데, 목차를 살펴보니 내용의 대충이 짐작이 간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책은 프랑스아 줄리앙의『무미 예찬』(프랑수아 줄리앙, 최애리 역, 산책자, 2010)이다. 이 책은 프랑스의 중국학 관련 최고의 권위자인 파리 7대학 교수[중국 고대사상 및 미학] 프랑스의 줄리앙의 중국의 담(淡) 사상에 관한 책이다. 줄리앙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신지영이 쓴『내재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이다. 이 책에서 그녀는 들뢰즈의 <내재성>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줄리앙의『사물의 성향』을 곁다리 텍스트로 활용했다. 줄리앙은 그 책에서 중국의 고대사상 및 철학의 핵심을 <내재성의 철학>으로 규정하고, 이를 고대 그리스 철학의 <초월성의 철학>과 대립시켰다. 
 
  

 

 

 
 


 

 
 

지금까지 번역된 줄리앙의 저서는 절판된『운행과 창조』까지 포함하면 모두 5권이다. 이중 네 권이 모두 작년 하반기부터 지금까지 번역된 것이다[그 중『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는 2004년에 출판한 것을 동일한 역자(허경)가 다시 번역한 것이다]. 이처럼 한 철학자, 사상가의 책이 비교적 짧은 기간에 여러 권 번역된다는 것은 그의 철학/이론/사상이 한국사회에서 실효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인데, 줄리앙도 과연 그러한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RATM의 기타리스트이자, 행동하는 뮤지션이 톰 모렐로에 관한 기사를 옮겨놓는다. 주지하다시피 RATM은 락 씬에서는 가장 과격한 좌파적 행동주의 그룹으로 잘 알려져있다. 거기다가 모렐로는 기타도 거의 신(神)의 경지에 이를만큼 잘 친다. 그건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창조적 사운드(Sound)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의 문제다. 그런 창조적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기타리스트 중 모렐로는 거의 최고다. 여지껏 사운드의 창조 면에서 그를 능가할 만한 기타리스트를 본 적이 없다. 아래의 기사는 그런 그가 한국의 콜텍 노동자 해고를 돕기 위해 자신이 직접 작곡한 노래를 한인타운의 시민단체 강당에서 연주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땅의 뮤지션들이 부끄러워 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한겨레21(2010.2.5)

 

“나를 바꿨듯 음악은 세상을 바꾼다” [2010.02.05 제797호]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세계적 기타리스트 톰 모렐로,
한국 노동자를 위해 직접 작곡한 노래 선보여

▣ 임인택


 

 

그처럼 신념에 가득 찬 ‘가수’를 본 적이 없다. 한국의 예술인은커녕 정치인도 그를 흉내내기 어려워 보인다. 한국은 그래서 불운하다는 사대주의마저 스멀거린다. ‘개념 예술인’의 부재를 넘어, 그런 가수를 빌보드 차트 1위에도 올리는 풍토에 주억댄다.  

음악에 문외한인 한국의 사회부 기자는 당황한다. 세계적 기타리스트와 단독 인터뷰를 하면서 전혀 애로가 없다. 음악까지 굳이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음악과 삶, 그리고 군살 없이 직조하는 그의 언어들이 하나인 덕분이다. 랩 메탈의 대표주자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TM·Rage Against The Machine)의 리더, 톰 모렐로(46)다. 평단은 그를 ‘행동주의 음악가’라 이른다. 연예인으로서 ‘반경’을 좁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는 아예 자신을 “급진 좌파”라고 몰아세운다.

포털을 검색하면 “그의 공연을 직접 보는 게 꿈” “창의적 기타리스트” 따위 한국 팬들의 글들이 즐비하다. 그런 그가 150명가량 모인, 미국 로스앤젤레스(LA) 한인타운의 한 시민단체 강당을 찾았다. 지난 1월13일 저녁 7시께다.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투쟁을 응원하기 위해서다.



-한국 노동자들을 지지하기로 한 이유가 궁금하다.

=한국 공장에서 정의와 존엄성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접했을 때, 펜더 같은 여러 미국 브랜드의 기타들이 실제로는 한국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에 놀랐다. 몇 주간 속성으로 공부를 했다. 미국에서 기타를 치는 대중이 알아야 할 사실이다. 나 같은 음악가는 메시지를 확대할 수 있다. 이런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준 한국 노동자들이 용감하다고 생각한다.

-노동착취 등에 대한 사실도 아는가.

=다국적기업, 부자기업이 이른바 ‘밑바닥 경주’(race to the bottom)를 벌이고 있다. 더 높은 노동자 권리나 환경보호 기준을 요구하는 나라를 떠나, 저임금에 노동자 권리나 작업환경 기준이 열악한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콜트·콜텍도 딱 그 경우다. 우리는 이걸 멈추고자 한다.




» 톰 모렐로



-그러나 노동자들로선 점점 더 권리를 주장하기 쉽지 않은 상황인데.
=난 한국 노동자들과 연대한다는 뜻을 밝히려 왔다. 기타는 자유를 표현하는 도구이지 착취의 수단이 아니다. 이번 투쟁은 국제적이다. 우리는 깊이 연관돼 있다. 여기 오는 것만으로 한국 노동자들이 중요한 한 발을 내디뎠다고 본다. 안 그러면 나도, 펜더도 이 문제를 알았을까. 여러 기타 소비자들도 몰랐을 것이다. 다국적기업이 세계적 수준에서 우리를 착취하려 든다면, 우리도 세계적 수준에서 맞서야 한다.


모렐로의 언어는 대개 “나”(I) 대신 “우리”(We)로 시작됐다. 그러면서 “한국 노동자들은 이제 무시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 존재를 우쭐대는 게 아니다. 당장 해결을 호언하는 것이 아니다. 끝을 함께 지켜볼 ‘동무’로 있겠다는 약속이다.


-노동자들이 결국 펜더 같은, 콜트에 주문생산을 하는 업체를 직접 압박하게 된다. 누군가는 부당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틀 전(1월11일) 펜더 관계자와 직접 얘기했다. 노동자들의 요구가 타당하고, 사회정의 차원에서 앞장서려면 이 사건을 바로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콜트·콜텍에서 만든 펜더·깁슨·아이바네즈(일본 브랜드) 등의 기타를 사지 말자고 주장하면, 많은 음악인과 젊은이들이 영향을 받을 거다. 기업들이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불매운동을 말하는 건가.

=일터에서 정의를 쟁취하지 못한다면, 콜트·콜텍은 물론 그들과 사업을 하는 업체에 대해서도 불매운동을 펼칠 것이다. 펜더는 물론 다른 브랜드의 책임자와도 (관계가 있다면) 기꺼이 얘기할 거다. 펜더는 이 이슈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사태를 안) 이후에도 일이 잘 전개되지 않으면 무지의 대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아주 큰 (미국) 국내 문제로 발전할 테니까. 단, 이런 운동은 노동자들이 추진하는 게 중요하다. 펜더나 아이바네즈에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럼 우린 이런 요구사항을 기꺼이 제안해주고,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실제 펜더는 법률 자문과 홍보 책임자를 내보내 지난 1월17일 오후 1시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과 만났다. 1시간30분 동안의 긴 대화가 이뤄졌다. 이들은 “이 자리를 기점으로 진상 조사가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콜트·콜텍 경영진을 직접 만나볼 의향은 없는가.

=이 싸움에서 내가 갖는 강점이 있다. 내가 콜트와도 대화할 순 있지만, 그들이 신경을 쓸지 모르겠다. 그러나 펜더는 (나와 같이) 펜더를 연주하는 이들이 펜더를 사지 말자고 하면 창피해할 것이다.

-다른 예술인들의 사회적 관심은 적다.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동료들에게 콜트 문제를 얘기하니 다들 관심을 보였다. 자기 기타는 ‘착취 공장’(sweatshop)에서 만들어진 게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했다.

-예술가들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긴 해야 할까.

=내가 할 말은 아니다. 난 관심을 갖는다. 예술가들에게 단 하나의 책임이 있다면, 그건 자신의 작품에 진실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진실로 느끼지 못하는 사안에 대해 관심 있는 척해야 한다고 보진 않는다. 반면 평화든 환경이든 노동자 이슈든 간에, 관심이 있다면 예술과 행동으로 표현해야 한다.

-처음 기타를 손에 쥔 때를 기억하나.

=(웃으며) 13살 때다. 50달러짜리 케이 기타를 선물받았다. 엄청 흥분했는데, 50달러짜리 앰프에 연결했지만 전혀 연주할 수가 없었다. 폴 매카트니의 <리브 앤드 렛 다이>(Live and Let Die)를 치려고 했는데, 그냥 줄을 튕기는 수준이었다. ‘두두두, 두두둣, 두두’ 소리를 내려고 했는데, 그냥 ‘앙앙’ 소리만 났다. 그게 첫 번째 연주였다.

-그냥 스크래치 아닌가.

=하하하, 소음이었다.

-당신에게 기타와 음악은 뭔가.

=난 기타를 선택하지 않았다. 기타가 나를 선택했다. 나는 내 신념을 예술로 엮어가야 할 의무를 느낀다. 음악은 세상을 바꾼다. 내 세상부터 바꿨다. 오늘 밤, 이곳 LA에서도 음악은 세상을 바꿀 것이다. 음악가들은 세상을 더 정의롭고 공정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거다.


모렐로에게 어떻게 ‘진보주의자’가 되었느냐고 묻자, 그는 “(진보보다) 왼쪽으로 더 더”라고 말하며 크게 웃었다. 그러곤 어머니 메리 모렐로를 가리켰다. 이탈리아계 여성운동가다. 케냐의 독립전쟁을 이끈 은게테 은요로게가 모렐로의 아버지다. ‘좌파 유전자’란 게 있다면 모렐로의 몸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흑인계 혼혈이라는 ‘출신’과 하버드대 사회학과 졸업이란 ‘성분’이 유전자를 더 단련시켰다.

그의 언어는 중량감으로 넘쳤다. “(이런 성장 배경 덕분에) 사다리 맨 밑에 위치한 이들 편에 서는 것이 나의 정치적 지표가 되었다. 사회 변화를 이끄는 음악을 만들 수 있길 열망한다.”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시민단체 강당으로 내려가 기타를 쥐었다. 한국 노동자들을 위해 직접 작곡해서 왔다는 노래를 맨 먼저 선보였다. <월드와이드 레벨 송>(Worldwide Rebel Song)이었다. 취지를 미리 비쳤다. “한국이건, 아이티건, LA건 타인을 위해 타인과 함께해야 혼자일 때보다 목표를 이룰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이다.”

실제 이날 공연에 모렐로는 물론 미국의 유명 가수 부츠 릴리, 웨인 크레이머 등이 참석했다. 해고 노동자들을 돕겠다며 팔을 걷어붙인 재미동포들, 그들의 다국적 친구들, 히스패닉, 아시아 노동자도 끼어 있었다. 터무니없이 작지만, 가장 국제적인 무대였다. LA 웨스트 8번가 3465번지에서 걸목 없는 지구 노동자의 세계 여행은 밤 12시가 넘도록 위무를 받았다.
  

 

◇◇◇ 연관기사 : 콜텍 노동자들의 해외원정 투쟁 ◇◇◇  

 

P.S 

더불어 음악계에서의 최대 화두였던 작년 크리스마스 때 <RATM의 영국에서의 전투의 승리> 사건에 대한 기사를 옮겨놓는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를 읽어보시면 안다.   

* 프레시안(2009.12.24)

◇◇◇ RATM의 영국에서 전투의 승리 ◇◇◇  

◇◇◇ RATM의 영국 BBC 라디오 공연 ◇◇◇      

 

  

◇◇◇ 딴지일보 관련기사 ◇◇◇



 
 
 

변산공동체를 이끌던 농부철학자 윤구병 선생님의 책이 출간되었다. 무려 세 권씩이나. 몇 해 전인가 선생님께서 공동체에 대한 실험이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판단을 하신 뒤로 공동체를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 공동체서의 실험의 성과가 이 세 권의 책으로 나왔다고 하니 반갑다. 아래의 인터뷰는 공동체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육성기록이다.  

* 한겨레(2010.2.5)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03112.html 

“지속가능 농촌공동체 15년 뒤 지켜보라”  


‘변산공동체 15년 실험’ 농부철학자 윤구병씨
2세대 자라나 자리 잡으면 이런 삶 선택 돌림병 퍼질것
아이들에 ‘돈’ 쌓을 꿈 대신 손발 놀려 사는 법 가르쳐야



한승동 기자  



» ‘변산공동체 15년 실험’ 농부철학자 윤구병씨  



15년 전 50을 넘긴 나이에 대학교수 자리를 훌쩍 내던지고 농촌공동체 건설을 꿈꾸며 전북 부안군 변산 땅으로 들어갔던 윤구병(67). 오로지 서구 근대 산업사회를 선망해온 우리 사회 주류의 삶을 근본적으로 회의하며 대안을 찾아나섰던 그의 혁명적 ‘변산공동체학교 15년 실험’은 성공했을까?  

“대학선생 노릇 그만둔 건 그게 행복하지 않아서였다. 어떤 삶이 행복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농사짓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행복을 기준 삼는다면, 어린 시절 시골에서 뛰놀던 시절을 빼곤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만족한다.” 지난 3일, 남다른 삶의 여정과 사색을 세 권의 책 <흙을 밟으며 살다>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 <꿈이 있는 공동체학교>에 담아 펴낸 그가 한겨레신문사를 찾았다. 당신 자신의 삶에 대한 소감은 그렇다 치고, 공동체 실험 전체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면? 오윤의 판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처럼 부리부리한 눈매에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다부진 체격의 그는 “(애초의 구상에서) 크게 어긋난 건 없다”고 말했다.

1995년에 세운 변산공동체는 지금 20여가구 50여명이 느슨한 지역공동체 틀을 유지하면서 논 2만3000㎡(7000평)와 밭 2만6000㎡(8000평) 정도를 일구고 있다. 화학비료와 살충·제초제 등의 농약, 비닐을 사용하지 않고 항생제로 키운 가축 배설물로 만든 퇴비도 쓰지 않는 완전 유기농법으로 자급하고 남은 건 외부에 팔기도 한다.

땅들은 여러 사람 명의로 돼 있지만 공증까지 한 내부 규약에 따라 경작권만 인정될 뿐 누구도 소유할 순 없다. 일도 공동으로 하는데, 독립해서 인근에 사는 사람들과 달리 밥을 함께 먹고 경제문제도 공동 해결하는 20명의 ‘식구’들은 돈도 함께 모으고 각자 필요한 만큼 쓴 뒤 기록하고 회의 때 얘기하면 된다. “공식 명칭을 변산공동체학교라고 한 이유는 아이들만 배우는 또 하나의 대안학교가 아니라 농사일 모르는 어른들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함께 살아가는 게 곧 배움이다.”

하지만 성패를 말하기엔 아직 이르다.

공동체 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 가운데 맏이가 지금 중학교 1년생이다. 이 아이들은 도시나 바깥세상에 대한 동경 같은 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면 여러 얘기도 듣고 더 넓은 세상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중등과정부터는 무전여행이나 역사적 장소를 돌아보게 하는 등 바깥세상 체험을 하게 한 뒤 각자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고 있다. 공동체 초기부터 그렇게 하기로 의논을 모았다. 그렇게 해서 그 아이들이 자라 다시 가정을 이루고 2세를 키우는 과정이 적어도 30년은 걸린다. 그래야 과거·현재·미래가 통합된 온전한 삶,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그 자식들이 고루 섞여 재생산되는 온전한 공동체가 안정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늙은이들만 남은 지금의 우리 농촌은 과거뿐이다. 그렇게 보면 적어도 한 세대는 지나봐야 실험의 성패를 얘기할 수 있지 않겠나.”  



  

» ‘변산공동체 15년 실험’ 농부철학자 윤구병씨


그럼에도 그는 이미 확신하고 있다. “15년쯤 더 지나 변산공동체가 제대로 서면, 아, 저런 삶도 괜찮겠구나, 아이들을 저렇게 키워도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하게 되고 실제로 이 길을 택하는 사람들이 돌림병 퍼지듯 늘어날 것이다.” 그가 보기에 지금 사람들은 100에 98은 성장·발전에 목매는 현 체제를 긍정하고 거기에 순응하고 있지만, “과연 행복하냐 하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석유·원자력 등 가공 과정에서 80%가 누출돼 대기와 물, 땅을 오염시키고 엄청난 쓰레기를 양산하는 물질 에너지에 의존하고 있는 도시문명 자체가 지속 불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서울에 오면 당장 똥오줌 문제부터 해결이 안 된다. 모든 게 상생관계인 생체(생명) 에너지에 의존하는 변산과는 달리 물을 엄청 써서 버려야 하고 그것은 낭비와 오염을 낳는다.” 사흘만 에너지가 끊겨도 모두 도시를 탈출해 농촌에서 약탈적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도시인들은 “모두 가슴에 총칼을 품고 있다”고도 했다.


윤구병의 신랄한 비판에는 성역이 없다. “어떤 때는 하는 짓이 지렁이 똥만도 못한 것들이 잔머리를 굴려 땅을 살립네, 공기를 청정하게 보호합네, 강바닥을 긁어내고 강둑을 높여서 물길을 바로잡네… 허풍을 떠는 데 그치지 않고, 온 생명체를 한꺼번에 도륙하는 아수라장을 만들면서도 그것을 허물로 여기기는커녕 자랑거리로 내세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이 그것을 유린하고 파괴한 백인문명보다 훨씬 고등한 것이라고 보는 그에게 지금 세상의 역류는 한층 더 심화되고 있다. 인간 세상과 온 생명체를 망가뜨리고 있는 것은 제국주의 사상과 살인기계로 무장한 이른바 선진국의 과똑똑이들과 거기에 빌붙은 후진국 매판세력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아이들을 유치원 때부터 강시나 좀비, 미라처럼 교실에 앉혀 놓고”, “남의 몫 가로채는 법, 남에게 기대 사는 법, 몸 놀리고 손발 놀려 살 길을 여는 게 아니라 잔머리 굴려 불쏘시개감도 못 되는 돈만 산더미처럼 쌓아올리는 게 유일한 꿈이라고 여겨 주식시장 같은 도박판 기웃거리면서 마지막에는 패가망신하는 노름꾼이 되는 법들만 가르치고 있다.” ‘아이들이 뛰어놀아야 나라가 산다’는 게 그의 신조다.

위로 ‘일병’부터 ‘팔병’까지 형이 여덟이었던 9형제의 막내 구병. 한국전쟁을 전후한 혼란 속에 “똑똑했다는 형들” 중 여섯이나 잃은 그의 아버지는 나머지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일자무식 농투산이로 만들 작정으로 서울에서 전남 함평으로 낙향했다. 12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두 번이나 가출했던 ‘불량학생’ 구병은 그럼에도 서울대 철학과를 대학원까지 마치고 충북대 교수가 됐으나 15년 만에 그만두고 그 역시 시골로 갔다. 이번에는 잔명을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속 불가능한 미래를 지속 가능한 미래로 바꿀 문명사적 대전환을 모색하기 위해.

그 실험은 진행형이다. 15년 뒤 윤구병의 기대대로 또다른 변산공동체들이 들불처럼 번져갈지 궁금해진다.  






» 〈흙을 밟으며 살다〉,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 〈꿈이 있는 공동체학교〉



40여년 쌓인 문제의식, 세권의 책으로

〈흙을 밟으며 살다〉,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 〈꿈이 있는 공동체학교〉 
 


윤구병 지음/휴머니스트·각 권 1만~1만2000원


“오늘 죽어도 아쉬울 게 없는 나이”가 됐다는 윤구병은 지난해 처음으로 보리출판사 대표라는 공식 직함을 얻었다. 보리는 1981년부터 충북대 철학과 교수로 있던 그가 1988년에 설립한 어린이·청소년 대상 생태·교육 전문 출판공동체다. 95년 그가 변산에 가면서 후배들이 맡아오다 지난해부터 다시 그가 경영 전면에 나섰다. 변산공동체와 민족의학연구원, 서울 서교동의 유기농식당 ‘문턱없는 밥집’ 등을 꾸려가는 데 큰 몫을 해온 보리 사업을 북돋기 위해 그는 요즘 월·화·수요일엔 서울에서 생활한다.

세 권의 책에 실린 글들도 원래 보리에서 책으로 내려고 70년대부터 써 모아 두었던 원고지 6000여장 분량의 글들에서 가려 뽑은 것이다. 76년에 창간됐다가 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당한, 한국 잡지사에 신기원을 열었다는 <뿌리깊은 나무> 초대 편집장도 지낸 그의 글은 매섭다. ‘공존’이라는 주제로 엮은 <흙을 밟으며 살다>, ‘생태’ 주제의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 ‘교육’ 주제의 <꿈이 있는 공동체학교>가 각각 담고 있는 지은이의 첨예한 문제의식을 엿본다.

“한마디로 도농관계는 착취-피착취의 관계다. 그런데 이 착취는 도시 사람들이 시골 사람들의 뼛골을 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도시 사람들은 시골 사람들을 징검다리 삼아 자연을 일방으로 착취한다. 자연을 일방으로 착취하는 길을 여는 것, 이것이 도시에 둥지를 튼 식민주의자들의 오랜 관행이고 꿈이었다. 시골 사람들을 억누르고 그 사람들의 일품을 뺏는 것은 동시에 자연을 훼손하고 오염시키는 길이다. 왜냐하면 시골 사람들에게는 사람과 자연의 관계가 1차관계이고, 이 관계는 목숨이 걸린 관계이기 때문이다. 도시 사람들에게 빼앗기는 만큼 자연에서 돌려받아야 하는데, 그러자니 어찌 땅도 물도 공기도 온전하게 살릴 길을 열 수 있겠는가?”

“우리가 살길은 거대도시화한 자본주의적 삶의 원리(따지고 보면 죽음의 원리다)에 맞서서, 더 구체적으로는 앞으로 몇 해 안 가서 자본가의 손아귀에 들어갈 어업과 농업과 임업에 맞서서 어촌과 산촌과 농촌에 하루바삐 협동적인 생산공동체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그 공동체를 튼튼히 지켜나갈 새로운 공동체적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다.”

“하루에 열 시간이 넘게 딱딱한 걸상에 궁둥이를 붙이고는, 살아가는 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대학입시용 교과서만 달달 외우게 밤낮으로 몰아대고 있으니, 이게 무슨 학교선생이 할 짓이고, 부모가 할 짓인가. 짐승들도 비록 남의 새끼일망정 이렇게 모진 학대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랑의 이름으로, 교육의 이름으로, 위에서는 대통령, 수상이라는 연놈들부터 아래로는 어중이떠중이 놈년들까지 모두 한통속이 되어 아이들을 집단으로 학대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집단학살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유대인 학살보다 더 참혹한 게 지금 온 세계의 교육현실이다. 이 미치광이 놀음에 가장 앞서고 있는 땅이 ‘대한민국’이다. 내가 보기에 교육을 책임지고 있다는 연놈들 가운데 ‘사디스트’가 아닌 놈년들이 거의 없다.”

취직해서 궁기 면한 것을 “이웃과 더불어 벗어난 것이 아니고 요행히 나만 살짝 빠져나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자책한 그가 교수직 내던지고 변산으로 간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글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마음의 사회학 
김홍중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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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의 제1부 <마음의 레짐: 진정성의 운명>에 대한 간략한 비평만을 담고 있다[그 중에서도 특히 제1장과 3장에 한정해서].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1) 1부는 이 책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머지 부분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2) 개인적으로 2부와 3부에 실린 글들은 이미 읽은 터라서 따로 비평을 할 필요가 없다. 3) 그리고 2부와 3부의 내용들은 일반인들이 소화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 없지 않다.  따라서 대중들이 그 글들을 읽고, 소통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하에서 이 책 1부의 핵심 개념과 내용인 <마음의 레짐과 진정성>과 <스노보크라시>에 대한 간략한 비평을 시도하고자 한다.   

<마음의 레짐>은 이 책 1부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개념이다.  김홍중은 뒤르켐의 <집합표상>, 베버의 <정신>, 푸코의 <에토스>, 아날학파의 <집합적 심성>(망탈리떼), 윌리암스의 <정서구조> 등을 <마음의 레짐>에 연관되는 사회학적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이 개념들은 모두 사회적 행위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암묵적이고 집합적인 정서적 특질을 지닌 것들로, 그가 <마음>이라고 지칭하는 것에 공통적으로 묶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는 이 <마음>이라는 개념이 사회적 행위자들의 습관화된 행동패턴을 지도하며 사회적 행위의 조형에 영향을 끼치는 구조화된 시스템인 <레짐>과 접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화학적 결과물은 <마음의 레짐>이라는 개념으로 제안된다. 김홍중은 이 <마음의 레짐>이라는 개념이 푸코의 '장치dispositif' 개념에 상응한다고 주장한다[이에 대해서는 주석 1)을 참조]. 그리고 진정성을 <주체화의 장치로 기능하는 마음의 레짐>으로 정의한다. 이때 그것은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수준에서 주체들의 삶의 형식들을 조형하는 힘이자, 구조이다(24~5). 그는 티릴링을 따라서 전근대적인 신실성과 근대적인 진정성을 구분하는데, 이때 진정성이란 "개인주의적 가치를 내면화한 근대적 인간이 공동체로부터 주어지는 역할 모델과  자신의 '진정한' 욕망 사이에 괴리를 발견하고 이를 주체적으로 극복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이상이다."(26) 또한 진정성은 "자신의 참된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로막는 사회적 힘과의 대립을 마다하지 않는 태도이며, 이런 과정에서 진정성의 주체는 소위 '불행한 의식'을 갖고 있는 주체성을 형성시킨다."(26)  

한편, "진정성은 '진정한 나'를 추구하는 자아정치, '진정한 사회'를 추구하는 현실정치가 결합해야만 하나의 레짐으로 현실화된다."(29) 한국 사회에서 그것은 80년대의 '민주화' 과정에서의 사회 전체의 구조적 변동을 야기하고 집합행동과 가치의 체계로서 구조화되는데, 그것은 소위 '386세대'라는 주체들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다. 김홍중이 볼 때, "그들은 경제적 발전의 수혜 속에서 삶의 의미를 추구할 수있는 여건을 통해서, 진정한 나를 추구하는 태도를 본격화한 세대이자,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집합적 연대를 체계적, 장기적으로 시도한 세대이다."(30) 진정성의 레짐은 "386세대를 정치적, 문화적, 도덕적 주체로서 생산해내는데, 그것은 민주화 시대를 관통하는 '규범적 우세종'으로 기능하게 된다[주석 2)를 참조]. 그러나 진정성의 레짐은 일부의 삶의 지향에 머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홍중은 "그것은 소수의 운동이 사회 전체의 흐름을 유도, 규정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386세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진정성의 가치는 당대 한국 사회의 규범적 지평을 규정하는 가장 지배적인 '마음의 레짐'으로 자리잡게 된다."(30~31)고 주장한다. 그런데 진정성의 레짐은 1) 주체 2) 내면 3) 공적 지평이라는 세 가지 구성요소로 되면서, 하나의 <이념형>(ideal type)으로 형성된다. 그것은 "윤리적 성찰에서 시작되어 이러한 도덕적 압력에 이르러 하나의 완결된 원환으로 닫히게 된다. 진정성을 추구하는 주체는 윤리적 성찰과 도덕적 압력의 이중 동력에 의해, 성찰적인 동시에 참여적인 주체로서 형성된다. 그 이상적인 형태에 있어 진정성의 주체는 그리하여,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고도의 윤리적 반성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또한 공적 영역과의 관계를 설정함에 있어서 그는, 공공의 문제가 실천을 요구할 때 이 실천의 영역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삶의 추구를 완성시키고자 한다."(34~5)  

하지만 진정성은 <폭력적 경향>과 <요절> 등의 한계를 지니기도 한다. 전자는 "도덕적 진정성과 윤리적 진정성의 절묘한 결합으로 구축된 '진정성의 레짐'이 언제든지 양자의 분리로 인해서 와해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불안한 체제"(37)라는 것으로 현시된다. 후자는 "진정성의 논리가 치욕적인 삶과 불후의죽음 사이에 선택지를 강요한다. 그리고 불후의 죽음을 통한 상징적 생명의 확보를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설정하는 것"(39)으로 현시된다. 이 두 가지 한계로 인해서 윤리적 성찰, 도덕적 참여에의 강제, 그리고 그것을 통한 공적 지평으로의 나아감이라는 구조적 행위 패턴으로 특징지어지는 진정성의 레짐은 매우 이상적이고, 드문 형태로 존재할 뿐더러, 불안하기까지 한다. 그것은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내포하고 있는 불안정하고, 이상적인 체제로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적어도 97년 IMF 경제위기 전까지는 존속하였던 것 이다. 그것은 요절이라는 숭고하고 아우라적인 죽음[진정성의 실천으로서]과 살아남은 치욕적이고 부끄러운 삶 사이의 선택을 강요한다. 이와는 달리 97년 체제 혹은 포스트-진정성의 체제는 그 <진정성의 레짐>이 와해되고, 파괴되고, 균열되었을 때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김홍중은 "97년 체제의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그 자체로 얼마나 어렵고 긴절한 과제였던가를 아프게 역설하는 동시에, 생존을 위한 그 절박한 몸짓들이 이제 사회적 규범과 분리되어 '자연화'되고 있다는 사실, 진정성 레짐이 내적으로 통합되고 있던 사적 세계와 공적 세계, 윤리적 성찰과 도덕적 규범, 내성과 참여가 각각 분리되어 자율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42)고 본다.

이상이 제1장 <진정성의 기원과 구조>에 관련된 내용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서 두 가지 근본적 비판을 가하고자 한다. 하나는 그의 <마음의 레짐>이라는 개념이 가진 문제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의 실제적 적용이 가진 사회학적 효용성에 관한 것이다.  

김홍중이 제시한 <마음의 레짐>이라는 개념은 분명 독창적인 측면이 있긴 하다. 하지만 우리가 볼 때 그는 이 개념을 너무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그는 이 개념이 뒤르켐이 『사회적 방법의 규칙들』에서 제시한 <사회적 사실> 혹은 <사회적인 것>에 상당한다고 말한다. 뒤르켐이 이 책에서 제시한 것은 오늘날 사회학에서 <구조>라고 말한 것에 상응한다. 뒤르켐은 이 책에서 <사회적인 것>이 사유양식, 행위양식, 감정의양식의 집합적 표상으로 의식적 차원에서 생산, 재생산, 전승되는 역사적 메커니즘을 강조한다. 김홍중은 뒤르켐이 여기서 특히 <감정양식>의 차원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면서, 그것의 실례로 사회심리학적인 측면에서의 군중의 집합적 심리행동에 큰 방점을 두고있다고 본다. 하지만 뒤르켐의 이 책에서의 군중의 사회심리학적 집합행동에 대한 태도는 다소 유보적이다. 그리고 그는 사회에 존재하는 세 가지 집합적 양식(집합적 표상)의 차원들에서 어느 하나에 방점을 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이 집합적 표상으로 물화된 것이 개인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면서 가지는 물질적 힘을 강조하는 것에 전력한다. 김홍중은 뒤르켐의 <사회적인 것>이 자신의 <마음의 레짐>과 적절히 상응할 수 있다고 판단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다. 『사회적 방법의 규칙들』에서 전자는 매우 심하게 닫힌 체계로 그려지고 있는 반면에, 후자는 매우 유동적이고, 개방적이고, 열려있는 체계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사회적 방법의 규칙들』에서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더욱이 김홍중은 자신의 <마음의 레짐>이 뒤르켐의 <사회적인 것>과, 푸코의 <장치>와, 베버의 <에토스>[특히 『신교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나타나는 주체의 미학화라는 테마]가 서로 상호적으로 상응한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간주하지 않는다. 적어도 푸코의 <장치>나 베버의 에토스가 권력의 미시물리학적 다이어그램[혹은 들뢰즈 식으로 말해서 배치]에 어느 정도 호응할 수 있다고 본다면, 뒤르켐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하나 덧붙인다면, 베버의 <에토스>는 <마음의 레짐>에 상응하기에는 행위자의 정신[김홍중의 <마음>에 상당하는]의 측면에 대한 방점이 가진 힘이 너무 크고, 뒤르켐은 정확히 그 반대다. 푸코의 <장치>가 물질적인 것[비담론형성체]과 비물질적인 것[담론형성체]의 사건적 배치를 통해서 객관적 선험적 장(場)을 형성하는 것[거기서 주체는 생산된다.]의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베버의 <에토스>와 뒤르켐의 <사회적인 것>이 그러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 우리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김홍중의 해석이 더 큰 문제를 지니고 있는 것은 그가 <마음의 레짐>이 푸코의 <장치>에 상응한다면, 그가 제시하고 있는 <진정성의 시대>로서 8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사회구조적 변동[즉 <마음의 레짐>에서의 구조적 변동]을 비물질적 측면과 물질적 측면 모두에 걸쳐 증명했어야 한다. 그의 <마음의 레짐>은 이념형적으로 그것을 그려내고있지만, 실제적 분석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사실 베버의 <에토스>도 하나의 <이념형>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면, 그것은 논리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한 해석학적, 문화과학적 보충이 시도된다. 김홍중이 그것을 시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현실에 대한 분석에서의 결과물은 그렇지 못하다. 즉 <마음의 레짐>이 다루는 현실은 이념형적으로는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의 배치로서의 <마음의 레짐>을 다루고자 하지만, 실제적 분석의 효과는 비물질적인 것의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베버가 『신교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정신[관념적인 것]과 충동[물질적인 것] 사이의 실천적 투쟁의 양상들을 분석하지만, 결국 정신의 충동에의 우위를 결정짓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한다면 김홍중의 <마음의 레짐>은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의 배치에서의 실천적 투쟁을 인정하고 있는 듯하지만, 거기서 강조되는 것은 진정성[혹은 마음의 레짐]의 정신적[관념적] 측면만이다.

이는 이른바 <386세대>에 대한 그의 <세대론적 옹호의 과잉>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아마도 그는 <386세대>가 그가 <마음의 레짐>의 이념형으로 설정한 것에 가장 가깝다고 간주한다. 이러한 설명은 그의 논리적 체계 내에서 두 가지 문제점을 드러낸다. 1) 그의 <마음의 레짐>은 뒤르켐의 <사회적인 것>이 가진 일반성에 상당하는 것이 아닌 독특성을 가진 것으로서 규정된다. 그가 주장하는 <마음의 레짐>으로서의 진정성은 사회적인 것의 일반성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규범적 우세종>만의 독특성에 한정된다. 따라서 80년대가 일반적인 수준에서 <진정성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히 틀린 말이다. 그 시대는 오직 <규범적 우세종>만의 독특성에 한정될 때만 <진정성의 시대>라고 규정될 수 있다. 2) 이런 논리가 현실에 대한 해석학적 분석의 결과에 관철된다면 더 큰 문제가 발생된다. 즉 80년대라는 <혁명이라는 실재에의 순수한 열정>에 다가가고자 하는 욕망의 시대에 대한 전유는 오직 <진정성의 시대>를 자기의 시대로만 전유하고자 하는 <386세대>의 욕망의 전유에 다름 아닌 것으로 규정되어버린다. 쉽게 말한다면 <진정성의 시대>로서의 80년대는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행위자들 일반에게 한정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386세대>라는 <규범적 우세종>에게만 한정되는 것이고, 김홍중의 <마음의 레짐>이 해석하고 있는 영역도 정확히 여기에만, 할당되고, 한정되어 설명된다. 이런 주장은 자연스럽게 <87년 체제>가 오직 <규범적 우세종>으로서의 <386세대>만의 것이라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물론 김홍중은 <마음의 레짐>이 가진 한계적 측면을 강조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 한계도 <386세대>만의 전유의 나머지 집합에서만 발생하는것이다. 그의 <마음의 레짐>에는 <386세대> 이외의 해당하는 집합적 영역은 고려되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는 80년대라는 <혁명이라는 실재에의 순수한 열정>에 다가가고자 하는 욕망의 시대에 대한 전유가 오직 <386세대>라는 규범적 우세종에게만 한정되는 것처럼 해석하는 김홍중의 주장이 지나친 <386세대>에 대한 그의 <세대론적 옹호의 과잉>의 한 단면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지워버릴 수 없다. 이로써 그는 <87년 체제>의 긍정성을 <386세대> 스스로 말살시킬 수 있도록 하는 이론적인 해석의 자원을 제공한다. 하여 그가 설정한 목표(telos)는 정확히 의도한 것과 정반대로 나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386세대>들이 현실의 수준에서 그렇게 행위한 것이 아닌가?  

80년대를 진정성의 시대로 규정하면서, 그것이 오직 <386세대>라는 <규범적 우세종>에게만 한정되는 것임을 해석학적, 문화과학적으로 강변하는 것의 의도하지 않는 아이러니에 직면한 김홍중은 이른바 <97년 체제>라고 명명되는 <스노보크라시> 시대에 대한 그의 설명에서 또 한 번의 아이러니에 직면한다. <이중의 아이러니>가 그의 주장에서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그는 <87년 체제>와 <97년 체제> 사이에서의 한국의 사회구조적 변동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이 곧장, 전자에서 후자로 나아간다.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386세대>라는 <규범적 우세종>이 가진 <중심기표>가 가진 역량의 우월성에 대한 그의 강조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그것의 무조건적 우월성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것이 펼쳐지는 논리를 비판하기 위해서 다음의 단계를 밟아야 한다.  

김홍중에게 <97년 체제>는 포스트-진정성의 시대이자, <스노보크라시>의 시대이다. 그에 따르면 "<스노보크라시>는 이중의 지배체계이다. 1) 그것은 스노비즘으로 무장한 도구적  성찰성의 주체들이 한국사회의 확고한 지배층으로 부상하는 과정이다. 2) <스노보크라시>는 거시적 통치성뿐 아니라 자아의 통치에 연관된다. 즉 서동진 식으로 말한다면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스놉으로 생산되는 것이다. 김홍중은 <스노보크라시>의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들이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시한 <악의 평범성> 개념을 비틀어 <악의 속물성>이라는 규범적 예속성에 붙들려있다고 비판한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 슬라보예 지젝이 "칸트와 함께 사드를"로써 표현한 법이라는 초자아[대타자]의 외설적 쾌락[너의 향락을 즐겨라!]이 가진 무시무시한 폭력성을 폭로한 것에 상응한다[지젝은 이를 유대인들의 인종청소라는 인종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예증한다]. 김홍중에 따르면 <스노보크라시>의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들로서의 스놉들은 살아 있는 시체인 좀비 그 자체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김홍중이 제안하는 대안은 <스노보크라시>의 시대에 작동하는 스노비즘적 규범의 예속성에 균열을 내는 윤리적이고, 성찰적인 주체의 역량에의 긍정이다. 이는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의 자동인형적 행동이 그의 무사유성에서 비롯되었음을 비판하면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대안으로 <사유하는 인간>[이는 <정치적 인간>으로 다른 책에서도 제시된다.]이 가진 고귀함을 강조하는 것과 같다. 김홍중은 아이히만이 매우 높은 수준의 <도구적 성찰성>을 가진 규범적으로 예속화된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규정하면서, 그 대안으로 <윤리적 인간>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이러한 주장에 이르기까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너무도 많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핵심적인 것은 다음의 네 가지다.

1) 김홍중은 도대체 왜 <97년 체제>[=포스트-진정성의 시대=<스노보크라시>의 시대]가 도래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전혀 시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386세대>라는 <규범적 우세종>에게만 한정되는 <마음의 레짐>이라는 이념형에 근접한 모델은 가치론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 따라서 <97년 체제>에서의 스놉들의 삶의 형식들은 가치론적으로 나쁜 것이 된다. 하지만 그것이 왜 도래했는가? 누가 그것을 도래하게 했는가? 에 대한 설명은 전혀 시도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외치고 싶어진다. 사실 <97년 체제>가 도래하게 된 것의 가장 큰 책임이 <386세대>라는 <규범적 우세종>에게 있는 것 아닌가? 이것을 부정할 수 있는가? <386세대>라는 <규범적 우세종>이 <87년 체제>의 긍정적 측면만을 전유하면서, 그 이후의 사회구조에서 발생하는 부정적 효과들을 가치론적으로 이분법화하면서 비판하는 것은 과연 윤리적으로 옳은 태도인가?  

2) 김홍중이 주장하는 포스트-진정성의 시대에서의 윤리적 주체의 역량에 의해서 구성될 <좋은 삶의 형식>이 그가 설정한 <마음의 레짐>의 이념형에 근접한 것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일종의 이분법적 가치론에 입각한 구별짓기의 부정적 몸짓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 아닌가? 시쳇말로 그것은 아렌트가  '좋은 정치' 혹은 '좋은 삶'을 긍정하면서 폴리스와 오이코스를 가치론적으로 구별짓기한 것, 즉 노예와 시민의 정치를 둘러싼 투쟁에서 전자의 정치에의 자격을 박탈하고, 후자만의 정치에의 자격을 부여한 것과 다를 바가 뭐가 있는가? 아렌트에게 있어 오이코스의 영역이 폴리스의 영역과 가치론적으로 구별된다고 한다면, 김홍중에게 있어 그것은 스노보크라시의 물질적인 것에의 순수한 열정에의 포획[스노비즘의 규범적 체계에의 예속화]과 그것으로부터의 윤리적 주체의 탈주를 가치론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여기서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스놉, 스노보크라시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생산되었으며,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이다. 김홍중은 이 측면을 의도적으로 간과한다. 그가 말하는 스노보크라시에 저항하는 윤리적 주체의 생산은 이 문제에 대한 해결 없이는 결코 이룩될 수 없다.  

3) 김홍중의 주장이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스노보크라시에 저항하는 윤리적 주체가 누가 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직면했을 때이다. 그 주체는 <진정성의 시대>를 전유한 <386세대>라는 <규범적 우세종> 가운데서, 이른바 <가짜 규범적 우세종>[주석 3)을 참조]을 제외한 영역에서 생산된다. 김홍중의 글을 찬찬히 읽다보면 그런 윤리적 주체가 속할 수 있는 집합적 영역은 극히 희미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4) 김홍중은 <80년대의 진정성>을 80년대 사회구조에서의 일반적 특성이 아닌, 독특성의 측면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는 <97년 체제의 속물성>을 일반적 특성으로 규정하면서, 여전히 거기서 전복적 주체의 윤리적인 실천의 가능성의 독특성을 보고자 한다. 그런데 그는 우리시대의 경제적인 특질들을 모두 속물성으로 일반화시켜 버리고 있지는 않는가? 이건 지나친 사회학적 일반화가 가진 위험성의 함정이 아닌가? 그러면서 그는 그 일반성으로부터 탈주하기 위해서 윤리적 주체를 요청하는 것, 즉 독특성을 요청하는 것에 매달리고 있지 않는가? 문화사회학자로서의 그의 이러한 해석학적 지향은 이른바 좋았던 옛시절을 그리워하는 그의 자발적 기억에의 경도의 발로가 아닌가? 이는 아렌트와 아감벤이 정치적 측면에서의 고대 그리스에로의 기원적 회귀를 열망하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즉 그는 <마음의 레짐>이라는 이념형에로의 회귀를 열망하는, 즉 <386세대>라는 <규범적 우세종>에게만 한정되는 진정성의 시대로의 열망을 시도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런데 이는 스스로가 386세대>라는 <규범적 우세종>인 그 김홍중이 자기자신게 거는 사회학적 최면이 아니고서 무엇이겠는가?

 

결론적으로 우리는 김홍중의 <마음의 레짐>에서 80년대를 자신들만의 <진정성의 시대>로 전유한 <386세대>라는 <규범적 우세종>에 대한 아직까지 살아남은 386세대들의 도덕적 자기최면의 마지막 그림자가 드리워있음을 보게 된다. 이른바 스노보크라시의 시대에 살아남은 그들에게 남은 것은 <가짜 규범적 우세종>의 은폐적 자기행위의 어두운 이면일 뿐이다. 그들은 스노보크라시의 시대에 윤리적 주체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하지만, 그들은 도덕주의의 예속화가 과잉적 형태로 전락했을 때 어떤 유형의 주체가 탄생되는지를 스스로 보여주고자 하는 자들일 뿐이다. 그들에게서 스노보크라시의 시대에 맞서는 윤리적 주체의 탄생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김홍중이 말하는 그런 윤리적 주체는 누가 될 수 있으며, 어떻게 될 수 있을까? 우리 스스로도 구체적 대안을 낼 수 는 없다. 하지만 그 가능성을 <386세대>라는 <규범적 우세종>에게서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이 민주화 20년의 비극적 결과가 아니고서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따라서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은 스노보크라시의 시대에  진정성의 시대의 마지막 생존자가 쓰는 슬픈 연서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김홍중은 자기 스스로를 최후의 인간으로 규정하는가?

 

주석 1) 하지만 우리가 볼 때 그는 푸코의 '장치' 개념을 너무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가 이 개념을 처음 제안했을 때는 1977년의 한 인터뷰에서였는데, 그때 그의 관심은 지식-권력의 네트워크에 의한 근대적 주체생산의 메커니즘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규명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김홍중은 자신의 <마음의 레짐>이 후기 푸코의 존재미학적 주체의 윤리적이고, 성찰적인 행위양식으로서의 에토스에 상응하는 한편, '장치'에 상응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마음의 레짐>이 푸코의 사상과 이론을 자신의 논의에 맞게 재구성했다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푸코였다면] 장치에 의해서 주체가 자신의 행위양식들을 형성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특정한 사회에서의 구조화된 행위양식의 패턴으로서의 레짐화로 귀결된다고 주장했을까? 그는 은연중에 푸코의 존재미학을 사회학적 일반화로 귀결시켜버린다. 폴 벤느가 볼 때 푸코의 존재미학적이고 윤리적인 주체로서의 자기배려하는 주체는 베버의 청교도적 에토스를 실천윤리적인 행위양식으로 구성해내는 주체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코는 그것을 애써 부정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베버사회학(주의)에 내재된 보편주의(혹은 일반화)의 함정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다.



주석 2) 하지만 김홍중은 진정성이 규범적 우세종으로 이해될 때, 그 시대 모든 구성원들이 진정성이라는 마음의 레짐에 구속되어 있었다거나, 당대에는 오직 진정성이라는 마음의 레짐만이 존재했다는 오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본다.



주석 3) 이 개념은 우리가 김홍중의 글을 읽다가 만든 조어다. 김홍중은 "스스로 이미 속물적인 삶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면서 80년대적 진정성을 규범화하여 이를 통해 새로운 세대의 삶을 부정함으로써 스스로의 속물적 삶을 은폐하는 자들 또한 스놉이다."라고 말한다. 김홍중의 설명대로라면, 80년대적 진정성을 규범화할 수 있는 주체들은 집합론으로 볼 때 그리 많지 않다. <386세대>이외의 주체들은 제외되어야 한다. 그럼 이른바 90년대 학번 이후의 세대가 남게 되는데, 그들이 그가 말하는 80년대적 진정성을 규범화 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2010-02-06 12:20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07 0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2-08 12:05   댓글달기 | URL
무화과나무님의 서평에서 나오는 꼼꼼함과 긴장감이 부럽습니다. 개인적으로 학술비평 차원에서 이런 평저, 이론서들에 대한 비판적 사유가 무엇보다 필요한 것 같은데, 많이 배우고 갑니다! 저는 요즘 호모사케르 같은 개념들을 (여성학 진영 등등에서 페미니즘 윤리와 벌거벗은 생명 식의..) 바로 인도주의적 사고로 환원하려는 시도들에 대해 )좀 비판적인 생각이 들어,,고민중입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무화과나무 2010-02-08 15:49   URL
감사합니다. 과찬의 말씀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리고 벤느의 푸코에 책은 덕분에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2-08 19:21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냥 역자이신 교수님 일을 잠깐 도와드린 것뿐, 사실 책 만들기 과정에서 내세울 것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제가 정말 부끄럽지요. 늘 정의로운 지식이 샘솟는 공간이 되길 기원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