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때로 삶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욕망한다.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이율배반. 

하지만 그 욕망이 성취되는 단 하나의 퇴로는  

바로 죽음에서이다.   

우리가 삶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지각하는 일시적인 것은 

삶 그 자체에서는 영원한 것으로 결코 되지 못한다.  

다만 그 순간을 시간의 마디 그 자체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는  

죽음만이, 

그것을 영원한 것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영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헬드의 『민주주의의 모델들』이 번역되어 나왔다. 그는 민주주의의 기원에서부터 동시대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주의의 유형을 분류한 뒤 그 나름대로의 창조적 대안을 제시한다. '자유주의적 사회주의'가 그것이다.

 

* 한겨레(2010.3.17)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410694.html 

심오함·대중성 겸비한 ‘민주주의 입문서’
데이비드 헬드 ‘민주주의의 모델들’ 출간
시민의 ‘숙의와 참여’ 가능케 할 대안 제시


이세영 기자


» <민주주의의 모델들>




 

 

 

 

 







영국 정치학자 데이비드 헬드의 <민주주의의 모델들>(후마니타스)이 번역돼 나왔다. 영국 폴리티 출판사 대표이자 런던정경대 교수로 재직중인 헬드는 스튜어트 홀이 영국 개방대학(Open University) 교재용으로 편집해 국내 대학에서도 현대문화 입문서로 널리 읽히는 <모더니티의 미래> <현대성과 현대문화>(현실문화연구)의 공동 저자로도 친숙하다. 이 책 역시 그가 개방대학 교수로 있던 1987년 교재용으로 집필한 뒤 여러 나라의 대학들에서 입문서로 활용돼온 ‘민주주의 독본’이다. 1996년과 2006년 두 차례 개정판이 나왔는데, 이 책은 2006년판(초판은 1989년 <민주주의 모델>로 소개)을 번역한 것으로 앞선 판본에는 없었던 ‘숙의 민주주의’(9장)와 ‘세계시민 민주주의’(11장) 부분이 추가됐다.

헬드는 이 책에서 시간적으로는 고대 아테네에서 20세기 말 사회주의 붕괴 이후까지, 이념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적 흐름에 이르기까지, 서구 민주주의의 다양한 조류를 10여개의 모델로 유형화한다. 이런 유형화는 ‘인민의 지배’라는 민주주의가 △인민의 참여 정도 △참여의 성격과 목표 △민주주의의 적용 범위에 따라 경합하는 복수의 유형들로 구별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이를 통해 헬드는 민주주의를 네 개의 고전적 모델(고전적 민주주의, 공화주의, 자유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과 다섯 개의 현대적 모델(경쟁적 엘리트민주주의, 다원주의, 법치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숙의민주주의)로 구분하는데, 주목할 만한 점은 헬드가 각 모델에 대한 비판적 평가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이 구상하는 바람직한 모델을 제시한다는 사실이다. 민주주의의 세 흐름인 공화주의와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장점을 선택해 절충한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다. 이것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기본으로 하되 공적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숙의와 참여를 가능케 할 실질적인 사회경제적 기반을 확보하는 것”이다.

책을 번역한 박찬표 목포대 교수는 “법치주의와의 갈등, 투표율 하락, 양극화, 정치의 사법화, 대중운동의 분출 등 서구 민주주의가 경험했던 다양한 난제들을 1987년 민주화 이후에야 비로소 맞닥뜨리게 된 우리 현실에서 오랜 경험이 농축된 다양한 민주주의 담론은 대증요법적 처방이나 기술합리적 해결책을 넘어서는 반성적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고 평가한다. 심오함이란 가치를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전문적인 내용을 쉽고 명료하게 풀어내는 헬드의 탁월함이 이번 책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된다.

이세영 기자



 
 
 

역사학계는 여전히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을 사이에 두고 지난한 투쟁 중인 것 같다. 물론 이 투쟁은 현재의 역사를 두고 벌어지는 투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관심은 민족주의의 함정[내발론]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근대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과, 글로벌주의[근대화론]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근대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 한겨레(2010.3.10)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409285.html 

 

‘내재적 발전론’ 둘러싼 ‘도전과 응전’ 불붙나
계간 ‘내일을 여는 역사’ 김용섭 논쟁


이세영 기자

» 식민사학의 정체성론·타율성론에 대항해 치밀한 실증연구에 기반한 자본주의 맹아론을 제출함으로써 내재적 발전론의 물줄기를 튼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 <한겨레> 자료사진


김용흠 연세대 교수(국학연구원)와 도면회 대전대 교수(역사문화학과)가 최근 6개월의 시간차를 두고 계간 <내일을 여는 역사> 지상에서 공방을 주고받았다. 지난해 9월 김 교수가 <역사학의 세기>(휴머니스트)에 대한 비판적 서평을 <내일을…>에 기고하자 책의 엮은이 가운데 한 명인 도 교수가 반박문을 써 맞불을 놓은 것인데, 관전자들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이 다툼의 중심에 한국 역사학계의 ‘뜨거운 상징’ 김용섭(연세대 명예교수)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탈민족주의 사학그룹의 김용섭 비판에
제자 김용흠 교수 “왜곡·과장됐다” 반박
도면회 교수 재역공…지면공방 본격화
  



발단이 된 <역사학의 세기>에는 탈민족주의적 ‘국사해체론’의 관점에서 성찰적 동아시아 역사상을 추구해온 한국과 일본 역사학자의 글 13편이 실려 있다. 김 교수는 이 가운데 국내 탈민족주의 사학의 대표주자 격인 윤해동 성균관대 교수(동아시아학술원)의 글 ‘‘숨은 신’을 비판할 수 있는가-김용섭의 내재적 발전론’을 핵심 표적으로 삼았다. 윤 교수의 글은 원래 2006년 봄 역사학대회에서 발표된 것인데, 김용섭을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역사학계의 ‘숨은 신’으로, 그의 ‘내재적 발전론’을 한국 사학계에서 작동하는 대표적 ‘지식권력’으로 호명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언론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당시 윤 교수의 ‘도발’은 논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학계의 제자 그룹이 아예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의도적인 무시에 가까웠다.  

 

 

 

 

 

 

 



그런데 윤 교수의 글이 3년 만에 단행본으로 묶여 출간돼 나오면서 멍석이 다시 깔렸다. 김용섭의 직계 제자인 김 교수는 <내일을…> 기고문에서 내재적 발전론이 “마르크스 역사 유물론의 (생산력/생산관계) 조응론과 (봉건제→자본제) 이행론에 바탕을 둔, 강력한 일국적 발전론”이며 “서구의 근대를 전범으로 설정하고 한국 사회의 발전경로를 이에 입각해 증명하려는 목적론적 도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윤 교수의 비판에 일차적 초점을 맞췄다. 김 교수의 핵심 전언은 김용섭 역사학이야말로 “한국사 연구에서 횡행하는 도식성·목적론과 투쟁해왔다”는 것인데, 그 근거로 “한국사에서 사적 토지 소유의 존재를 집요하게 추적해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국유제론이 사실과 어긋난다는 점을 밝혀”냈으며, “양반·지주층인 실학자들이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넘어 농민적 입장의 개혁론을 펼친” 사실에 주목했던 점 등을 꼽는다.

내재적 발전론이 “민족주의와 발전주의라는 패러다임을 박정희의 근대화론과 공유”함으로써 사실상 당대의 “국민 만들기 프로젝트에 동참”했다는 윤 교수의 비판에 대해선 “박정희의 민족주의·발전주의는 취약한 정통성을 위장하기 위한 정치선전에 불과”했던 것으로 “내재적 발전론의 그것과 표현만 같을 뿐 내용은 상반된 것이었다”고 김 교수는 반박한다. 이런 김 교수의 주장을 요약하면 윤 교수의 김용섭 비판이 과장과 왜곡, 날조에 근거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김 교수의 비판에 대해 도 교수는 내재적 발전론이 “식민사관에 대한 저항 논리라고 하지만, 그 안에는 오리엔탈리즘이 식민지에 인식론적으로 강요한 ‘주체로서의 국민/민족’ ‘발전’ 등의 개념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단지 주어와 목적어를 바꿔 사용하는 ‘반오리엔탈리즘적 오리엔탈리즘’일 뿐”이었다고 반박한다. 박정희의 민족주의·발전주의가 “단순한 정치선전으로 내재적 발전론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김 교수의 반박에 대해서도 “단순한 선전이었다면 박정희가 그처럼 장기간 독재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반문한 뒤 “민주화 운동의 주체세력들 역시 민주주의와 분배·평등을 말했지만 사실상 좀더 평등한 민족주의, 분배 정의가 좀더 이뤄지는 발전주의를 내세웠다는 점에서 근대화론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역공한다.

다만 도 교수는 내재적 발전론의 최종 목표가 “근대화를 지상 과제로 삼는 것”이었으며 “민족지상, 국가지상, 근대지상의 논리 위에 구축됐다”는 윤 교수의 애초 공격에 대해선 “김용섭은 이런 논리를 명시적으로 제시한 적은 없다”며 “김용섭 역사학 자체에 대한 지적으로는 과도하다”고 받아들인다.

6개월의 시간차를 두고 이뤄진 이들의 공방이 본격적인 ‘김용섭 논쟁’으로 이어질 것인지는 미지수다. 유념해야 할 대목은 김용섭의 제자로 참여한 김 교수나, 책의 엮은이임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윤 교수의 ‘대리인’ 자격으로 뛰어든 도 교수 모두 반년 전 개편된 <내일을…>의 편집위원이란 점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두 사람의 공방을 마케팅 차원의 ‘자가발전’이 아닌지 의심하기도 한다. 핵심 당사자인 윤 교수가 공방의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있는 점도 의아스럽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그와 그녀가 사랑한 시간이 억겁이 흘러 

그는 그녀를 알아보고, 그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떤 삶의 끝자락. 

 

인(因), 연(緣) 

눈이 부시도록 맑은 시냇물 한가운데

띄워놓아도  

  

서로 사랑할 수 없는 그와 그녀에겐...



 
 
 
루시드 폴(Lucid Fall) 정규 4집 - 레미제라블 
루시드 폴 (Lucid Fall) 노래 / Mnet Media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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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misérables>, 비루한 자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들

Lucid Fall(이하 폴)의 네 번째 앨범의 핵심 메시지는 원본 시디 주위를 휘감고 있는 아래의 원환적 문장들에 담겨있다.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가 마침표 없는 띄어쓰기로 되어있다. 단 첫 문장의 첫 단어 '가만히'와 마지막 문장의 마지막 단어 '피우네' 사이에 가운데 점이 찍혀있다. 끝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끝이 없는 어떤 원환적 세계를 그려내고 있는 듯하기도 하고, 사물 혹은 타자에 대한 평등한 배려가 담겨있는 듯하기도 하다. 어렴풋하고 몽환적인 안개[하지만 그 안개는 두 번째 앨범 <오, 사랑>에 비해서는 명료하고, 분명하다]. 불어 <les misérables>이 우리 말로 <비참한>, <비루한> 정도가 번역되듯이[복수로 쓰였으므로, 보다 정확히는 <비루한 것들>로 번역되어야 한다.] 폴의 이번 앨범은 [제목 그대로] <비루한 것들> 혹은 <비루한 자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고있다. 그 비루한 자들은 작고 작지만, 커다란 세상을 품고 있는 꽃잎들의 세계 그 자체다. 그들은 나고, 나는 그들이다. 그리고 그런 작고 작은 존재자들의 세계, 그 세계의 이야기(들)가 이 앨범 전체를 수놓고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나와 타자가 평등관계에 놓여질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의 전제들을 목격한다. 음악라는 감각적 장(場) 전체를 뒤흔드는 감각적 기계를 통해서 구성될 수 있는.


"가만히 귀 기울여 이 소리를 들어봐 이 작고 작은 꽃잎 하나가 커다란 세상을 품고 있구나 내 게으름 내 무관심 바쁘다는 내 핑계로 물 한방울 못 준 오늘 하루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대여 하지만 원망하는 눈빛 하나 없이 힘겹게 나를 보고 웃는 그대 당신이 작은 게 아니라 내가 한없이 작고 또 작은 걸 유난히 가무는 올해 가을을 견디고 있는 그대 이 작고 작은 꽃잎 하나에 내가 가늠할 수조차 없는 사랑 한없이 작은 나의 마음 속에도 피우고 피우네" 



이야기(들)의 이야기들 

폴이 비루한 자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들을 시작하기 전 첫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걸어가자>라는 곡이다. 이 곡으로부터 이 앨범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곡은 이 앨범 전체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곡인 동시에 폴의 음악 여정 가운데 가장 완벽한 곡이다[완벽한 가사, 작곡, 그리고 편곡]. 이 곡엔 비루한 자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들을 시작하기에 앞서, 그리고 자신의 삶의 새로운 전환점의 구체적 결과물을 내놓는 과정에서 폴 자신이 자신에게 거는 감각적 주문에 다름아니다. 그 감각적 주문의 토대 없는 토대, 근거 없는 근거가 되는 것은 자신의 '심장소리'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함께 걸어야 할 감각적 주문의 토대 없는 토대, 근거 없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 곡은 사운드 적으로도 거의 완벽에 가까운 곡일 뿐만 아니라 폴 음악의 현재성을 지표화하는 곡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이야기들의 감각적 주문의 토대 없는 토대, 근거 없는 근거가 되는 <걸어가자>라는 곡이 하나의 주름을 만들어놓음으로써 시작된 앨범은 첫 곡 <평범한 사람>으로부터 다시 시작된다. 잘 알려졌다시피 이 곡은 작년 용사참사를 소재로 삼고 있다. 곡의 내용에 비해 사운드는 경쾌한 것이 아이러니하게 들리는 곡이다. 덧붙여 이 곡은 용산참사로 죽어간 자들의 빈자리를 우리가 어떻게 채워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색다른 문제를 던진다. 여러 가지 기타와  나머지 악기들의 조합이 잘 이루어진 곡이다.  

<오, 사랑>부터 폴의 앨범 가운데 형식적으로 항상 동명 타이틀이 되었던 세 번째 트랙의 <Les misérables>은 80년 광주민주항쟁 당시 폭압적 국가폭력에 의해서 늦은 봄의 이슬로 사라져야만 했던 광주시민들의 비루한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세 번째 트랙 <Les misérables> Part 1은 똑같은 사건을 남자의 시선으로, 네 번째 트랙 <Les misérables> Part 2은 여자의 시선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음악적 형식은 3박자의 왈츠곡이지만, 두 트랙의 악기 배치는 조금 달리 가져갔다. 이 두 트랙도 음악적으로는 지극히 아름답지만 내용은 지극히 슬프다. 이율배반. 하여  세 번째 트랙과 네 번째 트랙이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 곡은 비루한 자들의 죽음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미학적/예술적 승화의 결과물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트랙인 <벼꽃>은 그것이 형식적, 실질적 차원으로 변이된 하나의 은유적 사태를 지칭하고 있다. 이 곡에서 우리는 인간의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 자신의 생명을 있는 그대로 외치는 것에 대한 아무런 구속없음을 시도하는 폴의 생명론적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이는 다음 곡 <고등어>와 <문수의 비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수없이 많은 가난한 자들의 저녁 밥상을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고등어가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나를 고를 때면 내 눈을 바라봐줘요. 나는 눈을 감는 법도 몰라요."라는 외침이다. 이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윤리적인 행동은 고등어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눈을 바라봐주는 것이다. Jazzy한 분위기가 눈에 띄는 곡이며, 소프라노 색소폰 연주는 이 곡의 백미다.  

전형적인 보사노바 풍의 곡 <그대 슬픔이 보일 때면>, 역시 Jazzy한 <그대는 나즈막히>, 단아한 소품곡 <봄눈>에서는 남녀 간의 사랑, 믿음, 관계(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남녀 간의 사랑은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의미에서의 꽃잎으로 될 수 있지만, 그것은 또한 가장 무심한 듯 잊어버리고 살아가면서 관심을 두지 않는 그런 꽃잎일 수도 있다. 그래서 폴의 이야기처럼 "떨어지지 않는, 시들지 않는 그대라는 꽃잎"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무한한 인내와 관심이 필요한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사랑의 전부일 게다.  

<외톨이>, <알고 있어요>, <유리 정원>은 자신의 욕심 만을 채우기 급급한 현대인의 일상에서 잊혀져가는, 배제당한,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타자의 괴로움,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에 대한 폴의 선택은 정치적 급진성을 추동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들이 세상에 섞일 수 있도록 따스한 손길을 베푸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사랑한다는 말"을 들려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윤리적인 행위라고 지칭하지 않고, 정치적 행위라고 지칭하고자 한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의 가장 위대한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앨범의 마지막 트랙이 우리의 삶의 고통을 이겨낸 뒤 마주 앉아서 서로가 서로에게 꽃잎으로서의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하면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물론 여기서 '그대'가 사랑하는 남녀 사이가 아니어도 좋다. 차라리 사랑으로 서로가 서로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꽃잎으로서의 존재자들의 관계가 '그대'다. 이 앨범은 그런 존재자들의 사이를 따스한 시선으로 바로보고 있다. 앨범의 시작이 겨울이라는 계절에서 시작해서 봄으로 끝나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아무리 시간이 원환적으로 흘러간다고 해도 겨울의 상처를 쓰다듬는 것은 봄의 사랑의 힘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