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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 폴(Lucid Fall) 정규 4집 - 레미제라블
루시드 폴 (Lucid Fall) 노래 / Mnet Media / 2009년 12월
평점 :
<Les misérables>, 비루한 자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들
Lucid Fall(이하 폴)의 네 번째 앨범의 핵심 메시지는 원본 시디 주위를 휘감고 있는 아래의 원환적 문장들에 담겨있다.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가 마침표 없는 띄어쓰기로 되어있다. 단 첫 문장의 첫 단어 '가만히'와 마지막 문장의 마지막 단어 '피우네' 사이에 가운데 점이 찍혀있다. 끝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끝이 없는 어떤 원환적 세계를 그려내고 있는 듯하기도 하고, 사물 혹은 타자에 대한 평등한 배려가 담겨있는 듯하기도 하다. 어렴풋하고 몽환적인 안개[하지만 그 안개는 두 번째 앨범 <오, 사랑>에 비해서는 명료하고, 분명하다]. 불어 <les misérables>이 우리 말로 <비참한>, <비루한> 정도가 번역되듯이[복수로 쓰였으므로, 보다 정확히는 <비루한 것들>로 번역되어야 한다.] 폴의 이번 앨범은 [제목 그대로] <비루한 것들> 혹은 <비루한 자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고있다. 그 비루한 자들은 작고 작지만, 커다란 세상을 품고 있는 꽃잎들의 세계 그 자체다. 그들은 나고, 나는 그들이다. 그리고 그런 작고 작은 존재자들의 세계, 그 세계의 이야기(들)가 이 앨범 전체를 수놓고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나와 타자가 평등관계에 놓여질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의 전제들을 목격한다. 음악라는 감각적 장(場) 전체를 뒤흔드는 감각적 기계를 통해서 구성될 수 있는.
"가만히 귀 기울여 이 소리를 들어봐 이 작고 작은 꽃잎 하나가 커다란 세상을 품고 있구나 내 게으름 내 무관심 바쁘다는 내 핑계로 물 한방울 못 준 오늘 하루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대여 하지만 원망하는 눈빛 하나 없이 힘겹게 나를 보고 웃는 그대 당신이 작은 게 아니라 내가 한없이 작고 또 작은 걸 유난히 가무는 올해 가을을 견디고 있는 그대 이 작고 작은 꽃잎 하나에 내가 가늠할 수조차 없는 사랑 한없이 작은 나의 마음 속에도 피우고 피우네"
이야기(들)의 이야기들
폴이 비루한 자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들을 시작하기 전 첫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걸어가자>라는 곡이다. 이 곡으로부터 이 앨범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곡은 이 앨범 전체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곡인 동시에 폴의 음악 여정 가운데 가장 완벽한 곡이다[완벽한 가사, 작곡, 그리고 편곡]. 이 곡엔 비루한 자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들을 시작하기에 앞서, 그리고 자신의 삶의 새로운 전환점의 구체적 결과물을 내놓는 과정에서 폴 자신이 자신에게 거는 감각적 주문에 다름아니다. 그 감각적 주문의 토대 없는 토대, 근거 없는 근거가 되는 것은 자신의 '심장소리'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함께 걸어야 할 감각적 주문의 토대 없는 토대, 근거 없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 곡은 사운드 적으로도 거의 완벽에 가까운 곡일 뿐만 아니라 폴 음악의 현재성을 지표화하는 곡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이야기들의 감각적 주문의 토대 없는 토대, 근거 없는 근거가 되는 <걸어가자>라는 곡이 하나의 주름을 만들어놓음으로써 시작된 앨범은 첫 곡 <평범한 사람>으로부터 다시 시작된다. 잘 알려졌다시피 이 곡은 작년 용사참사를 소재로 삼고 있다. 곡의 내용에 비해 사운드는 경쾌한 것이 아이러니하게 들리는 곡이다. 덧붙여 이 곡은 용산참사로 죽어간 자들의 빈자리를 우리가 어떻게 채워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색다른 문제를 던진다. 여러 가지 기타와 나머지 악기들의 조합이 잘 이루어진 곡이다.
<오, 사랑>부터 폴의 앨범 가운데 형식적으로 항상 동명 타이틀이 되었던 세 번째 트랙의 <Les misérables>은 80년 광주민주항쟁 당시 폭압적 국가폭력에 의해서 늦은 봄의 이슬로 사라져야만 했던 광주시민들의 비루한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세 번째 트랙 <Les misérables> Part 1은 똑같은 사건을 남자의 시선으로, 네 번째 트랙 <Les misérables> Part 2은 여자의 시선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음악적 형식은 3박자의 왈츠곡이지만, 두 트랙의 악기 배치는 조금 달리 가져갔다. 이 두 트랙도 음악적으로는 지극히 아름답지만 내용은 지극히 슬프다. 이율배반. 하여 세 번째 트랙과 네 번째 트랙이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 곡은 비루한 자들의 죽음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미학적/예술적 승화의 결과물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트랙인 <벼꽃>은 그것이 형식적, 실질적 차원으로 변이된 하나의 은유적 사태를 지칭하고 있다. 이 곡에서 우리는 인간의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 자신의 생명을 있는 그대로 외치는 것에 대한 아무런 구속없음을 시도하는 폴의 생명론적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이는 다음 곡 <고등어>와 <문수의 비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수없이 많은 가난한 자들의 저녁 밥상을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고등어가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나를 고를 때면 내 눈을 바라봐줘요. 나는 눈을 감는 법도 몰라요."라는 외침이다. 이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윤리적인 행동은 고등어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눈을 바라봐주는 것이다. Jazzy한 분위기가 눈에 띄는 곡이며, 소프라노 색소폰 연주는 이 곡의 백미다.
전형적인 보사노바 풍의 곡 <그대 슬픔이 보일 때면>, 역시 Jazzy한 <그대는 나즈막히>, 단아한 소품곡 <봄눈>에서는 남녀 간의 사랑, 믿음, 관계(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남녀 간의 사랑은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의미에서의 꽃잎으로 될 수 있지만, 그것은 또한 가장 무심한 듯 잊어버리고 살아가면서 관심을 두지 않는 그런 꽃잎일 수도 있다. 그래서 폴의 이야기처럼 "떨어지지 않는, 시들지 않는 그대라는 꽃잎"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무한한 인내와 관심이 필요한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사랑의 전부일 게다.
<외톨이>, <알고 있어요>, <유리 정원>은 자신의 욕심 만을 채우기 급급한 현대인의 일상에서 잊혀져가는, 배제당한,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타자의 괴로움,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에 대한 폴의 선택은 정치적 급진성을 추동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들이 세상에 섞일 수 있도록 따스한 손길을 베푸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사랑한다는 말"을 들려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윤리적인 행위라고 지칭하지 않고, 정치적 행위라고 지칭하고자 한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의 가장 위대한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앨범의 마지막 트랙이 우리의 삶의 고통을 이겨낸 뒤 마주 앉아서 서로가 서로에게 꽃잎으로서의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하면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물론 여기서 '그대'가 사랑하는 남녀 사이가 아니어도 좋다. 차라리 사랑으로 서로가 서로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꽃잎으로서의 존재자들의 관계가 '그대'다. 이 앨범은 그런 존재자들의 사이를 따스한 시선으로 바로보고 있다. 앨범의 시작이 겨울이라는 계절에서 시작해서 봄으로 끝나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아무리 시간이 원환적으로 흘러간다고 해도 겨울의 상처를 쓰다듬는 것은 봄의 사랑의 힘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