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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프리즘 - 우리 시대의 교양
고병권.천정환.김동춘.이찬수.오길영.이대근.안수찬.은수미. 윤형.김현진 지음 / 사계절출판사 / 2010년 2월
평점 :
나는 존중은 하되, 존경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래봤자 다 저 살려고 발버둥치고, 변하기 마련이라고. 어린 시절에 자기합리화를 그런 식으로 했던 것 같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의심이 많고, 조금 알면 금세 회의하는. 지금 돌아보면, 깊이 관심 가지면 소중한 것으로 내 속에 자리 잡게 될까봐 두려워했던 게 아닐까 싶다. 언제든 도망칠 수 있는 깊이, 버릴 수 있는 정도의 가치. 쿨함이 나를 편하게 해줄 거라는 삐딱한 생각. 내 시대는 내가 선택한 게 아니니까 비켜서서 가리라는 편협한 사고가 나름 합리적이라고 여겼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 리영희를 만났다. 친구의 손에 든 책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읽는 유명한 책에는 또 별 관심이 없어 제끼려는데 친구가 하는 말이 “너 같이 의심 많은 녀석에게 제격인 책이야”라고 하길래 쭈뼛쭈뼛하며 받아들었다. 리영희와의 만남은 불편했다. 달지 않고 쓰니까.
신성한 것에 대해서는 의심만으로도 ‘죄’가 된다. 그것은 복종만을 허용하기 때문에. 지능을 넘어서는 본능적이라고 할 만한 이성으로 ‘감히 알려 하고 감히 말하려 하는’ 용기와 각오를 실천한 리영희. 지식을 전달한 사람이라기보다는 각성을 전달한 사람. 가르치는 사람이기보다 일깨우는 사람. 제대로 된 ‘인간주의자’.
이 책, 《리영희프리즘》은 이 시대의 인간주의자 리영희를 두고 열 가지 스펙트럼이 펼쳐놓는다. 의식화의 은사로서의 리영희가 어떤 의미인지 돌아보며 지금 우리네 의식을 재고한다. 리영희의 책은 지난 시대의 필독서였지만 이 시대에도 유효한 근거를 밝힌다. 그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휘말린 전쟁과 아직 오지 않은 평화를 그려보기도 한다. 지식인에게 야단치기를 주저하지 않는 거침없는 호통으로 지식인의 책무를 묻는다. 리영희를 통해 이 시대 사회과학의 딜레마를 짚어보고 살아갈 길을 고민한다. 열 가지 프리즘은 앞에서도 뒤에서도 밝히듯이 리영희에게 바치는 글이 아니라, 그에게 비춰 푸석푸석한 이 시대에 바치는 호소다.
혁명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바뀔 수밖에 없는 거지요. 국가 사회의 지배 세력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없는 사람들을 박탈하고 모두에게 공정히 돌아가야 할 기회를 빼앗는다면 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중략) 그동안 누리지 못한 평등, 상호부조, 공평, 정의, 이런 것에 대한 갈구가 불같이 일어나는 겁니다. 바로 그런 게 역사예요. -리영희 p.219
가졌다 다 빼앗기고, 일어났다 또 넘어지고, 벗어났다 다시 잡히고 마는 어찌 보면 허무함의 극치일 수도 있는 지난날들. 되는 게 없다며 떠난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리영희 프리즘으로 보면 지난한 날들은 역사변증법의 과정이다. 조금씩 혁명이 일어난다는 것, 사회는 절대 그런 치열한 싸움 없이 변하지 않는 다는 것, 견뎌내는 것이 진짜 투쟁이라는 진실을 의식화하는 것이 리영희 스타일이다. 그렇게 리영희 스타일은 우리 시대 교양이 된다. 그게 쿨함이 질병처럼 번지는 이 시대에, 리영희 이름 석자로 보는 열 가지 프리즘이 꼭 필요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