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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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은 절대 무슨 뜻을 달거나 이유를 붙여서 선물하지 않는다. 선물을 할 때는 그냥 상대방의 눈에 띄는 장소에 놔두고 가버린다.”

 

상당히 유명한 작품이다. 장기간 베스트셀러를 기록했고 지금도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책이다. 언제나 그렇듯 뒷북으로 이제야 읽었다.

 

사람들이 열광하고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는 책들을 신뢰하지 않는 버릇이 있다. 때문에 뭐 결국은 읽게 되더라도 남들 읽을 때에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무슨 심보인지…. 이 책이 대단히 유명하거나 사람들이 열광한 책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목만 어렴풋이 알고 있던 책이었음은 고백해야겠다.

 

하지만 이제 책을 덮고 오랜 만에 느끼는 먹먹함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하고 찾는 책에는 그만한 이유도 얼마쯤은 있다는 사실을. 아주 오랜만에 눈물을 글썽이게 했으니 말이다.

 

인디언에 대한 우리들의 고정관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변해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내 기억에 의한 것이지만, 우리 윗세대들은 헐리우드에서 만든 기형적 서부영화의 영향으로 인디언들을 악으로 생각했고, 이제 젊은 세대들은 과거에 아메리카 대륙에 살고 있던 원주민, 미개인 정도? 그리고 최근에야 각종 영화나 서적을 통해 인디언들의 삶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조금씩 알고 있는 정도다.

 

뭐 여전히 인디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담은 드라마나 영화들이 나오기는 한다. 인디언 구역에서 카지노 등 도박 시설을 통한 수익에 의존하고, 마약이나 알코올에 찌들어 미래를 잃어버린 민족 정도로. 아주 가끔은 말도 안되는 능력을 부리는 초능력자로 비쳐지기도 한다. 뭐 그야말로 만드는 사람 맘대로다.

 

하지만 인디언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그들이 자연과 어떻게 조화로운 삶을 이루어왔는지, 그들의 소유하지 않는 삶을 서구 문명이 어떻게 파괴하고 짓밟았는지, 의외로 자세히 알고 있는 이들은 여전히 드물다. 최근 흥행 돌풍을 일으켰던 영화 《아바타》의 영향으로 과거 캐빈 형의 《늑대와 춤을》이 다시 이야기되고, 미국 건국 초기 일어났던 인디언 대학살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 미국인들, 그리고 세계인들은 인디언의 치열했던 삶을 알지 못한다.

 

책은 바로 그 인디언, 체로키의 후예 ‘작은 나무’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산 생활 이야기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산 속에서 생활하게 된 ‘작은 나무’는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생명에 대한 예의, 자연에 대한 예의를 배워가며 진정한 인디언 체로키로 성장한다. 그 하나 하나의 장면들은 눈을 감으면 떠오를 정도로 생생하고, 또한 아름답다. 결코 재미로 생명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할아버지의 가르침. 언제나 필요한 만큼만 자연에게 얻고 나머지는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할머니의 가르침은 정작 ‘작은 나무’가 아닌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죽비이다.

 

‘작은 나무’가 보내는 산 속의 생활들은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안에서 ‘작은 나무’는 자연의 냉혹함과 포근함을 동시에 알게 된다. 언제나 인간이 노력하고 존중하는 정도 내에서만 보답해주는 자연의 이치. 욕심을 부리면 더 이상 자연은 너그럽지 않다. 자연은, 또 이 세상은 결코 인간 혼자만이 살 수 없는 ‘모두의 터전’임을 책을 이야기한다. 이런 당연한 이야기가 무색한 지금에서, 책은 더욱 소중하다.

 

‘작은 나무’의 너무나 행복한 삶을 깨뜨리려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문명이다. 이는 체로키 인디언들이 강제로 살던 고향에서 추방당하고 산 속으로 숨어들었던 역사와 같다. 그리고 종교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부정하고 타 집단을 미개인으로 규정해 버리는 죄악. ‘작은 나무’는 ‘사생아’라는 단어의 뜻도 모른 채 사생아라는 욕을 들어야 했고, 결국 ‘악의 씨앗’이라는 말까지 듣는다. 하지만 인디언의 마음을 이미 가진 ‘작은 나무’는 화내기는커녕 왜 목사가 화를 내야 하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자신은 다만 짝짓기하려는 사슴들의 사진을 보고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 말이다.

 

책 속에 담겨진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모두 독자들을 위한 선물이다. 읽는 이들은 함께 웃고 함께 즐거워하다, 함께 울게 된다. 자연의 이치에 순종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절제된 삶을 살아갔던 체로키 인디언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우리들에겐 너무나 값진 선물이다. 우리는 다시는 체로키 인디언들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기엔 너무 멀리 왔지 않은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결국 못 참고 말았다. 약간 쑥스러운 눈물이다. 하지만 오히려 고마웠다. 책을 덮고도 한참을 그냥 있다. 그리고 내가 있는 이곳을 새삼 둘러본다. 그리고 기억하려 애쓴다.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했던 이들의 얼굴을.

 

자신이 가야 할 때를 알고 있는 이들의 작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작은 나무야, 나는 가야 한단다. 네가 나무들을 느끼듯이, 귀기울여 듣고 있으면 우리를 느낄 수 있을 거다. 널 기다리고 있으마. 다음번에는 틀림없이 이번보다 더 나을 거야. 모든 일이 잘될 거다. 할머니가.”

 

너무나 많은 삶의 교훈이 담겨 있는 귀한 작품이다. 책 읽는 즐거움은 이래서 멈출 수 없다.



 
 
 
요새 젊은 것들 - 발칙한 반란을 꿈꾸는 
단편선.전아름.박연 지음 / 자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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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반란을 꿈꾸는”20대들의 이야기. 역시 20대인 필자들은 애초부터 보편성을 때려치우고, 분야를 막론하고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고군분투, 혹은 독고다이로 살아가고 있는 ‘보편적’이지 않은 20대들을 인터뷰 했다.

 

기성세대들이 저지르는 만행 중 하나는 무턱대고 훈계하고 가르치려 한다는 것이다. 도대체가 상대방이 어떤 상황인지 헤아릴 줄 모른다. 그냥 닥치고 하라는 대로 하라고 떠든다. 그리고는 젊은 세대, 요새 것들은 무기력하다, 무능하다, 생각 없다 등등의 헛소리를 남발한다. 하지만 전에도 말한 바 있거니와 대체 생각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냐는 말이다.

 

하긴 기성세대들에게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것이 조금 뻘쭘한 시대이긴 하다. 이유를 불문하고 싸움이 터졌다 하면 “넌 몇 살이나 처먹었어! 넌 부모도 없냐 이 자쉭아~!”를 일갈하는 기성세대. 난 그럴 때마다 ‘만약 저 어린 아해가 정말 부모님이 안 계신 아해라면…저 아저씨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생각하곤 한다. 대체 싸움에서 나이를 들먹이는 민족, 혹은 집단이 또 있을라나.

 

한때 회자되었던 ‘20대 개새끼론’이 있었다. 촛불 정국 이후에 조금 크게 불거진 개새끼론은 “20대에겐 희망이 없다. 우리는 10대 촛불소녀에게 올인할란다”로 요약할 수 있겠다. 지금의 20대는 시대를 고민하기보다는 당장의 생계, 즉 ‘먹고사니즘’에 빠져있다는 비판이다. 토익에 올인하고, 자격증에 올인하고, 스펙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젊은 세대들을 향해 준엄하게 꾸짖는 모양새다.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이 무뇌아들아!”

 

하지만 양심적으로 손을 얹고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더라도, 대충 그냥 한 번 생각이란 것을 해보자. 과연 지금 20대들이 생각 없는 무뇌아들일까. 잉여인간들일까. 그들은 이명박이 마냥 이뻐 죽겠고, 4대강 살리기가 베리 땡큐며, 삼성공화국에 이민가서 살고 싶다는 마음만 가지고 있을까.

 

책에 등장하는 범상치 않은 20대들은, 물론 20대를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 20대들의 진정한 고민이 무엇이며, 왜 대다수라 매도되는 20대들이 무기력해 보일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준다. 과거에 비해 비교할 수조차 없이 치열해진, 아니 치열을 떠나 극단적인 생존경쟁 시스템에 이들을 몰아넣은 이들은 누구인가. 20대 스스로 이따위 개 같은 세상을 원했나. 그건 정말 아닐 것이다. 사춘기 당시 명퇴다 뭐다 해서 무너지는 아버지를 목격하고, 빌어먹을 민주화나 조국 통일의 숭고한 가치보다는 당장 월급이 끊긴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뼈저리게 느낀 이들이 지금의 20대들이다. 나 역시 IMF 당시 쫓기듯 군대로 피신한 기억이 있다. 에이 빌어먹을. 꺼이꺼이….

 

그런 20대들에게 사회는 결코 다양한 기회를 열어주지 않았다. 소위 기성세대들의 불의를 참지 못해 용감히 나섰던 386선배들도 결국 또이또이임이 드러났다. 그들은 학점이 아무리 개판이어도 대기업 취직이 가능했으며, 기득권이 된 이후에는 오히려 자신들의 자녀를 해외로 유학시키고, 원정출산이다 뭐다 개지랄을 떨었다. 또 노무현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개혁 세력 역시 젊은이들이 휴일을 포기해가며 투표한 보람이 그야말로 무색하도록 무력했다. 열린우리당은 지들끼리도 열리지 못하고 무너졌고, 결국 이명박과 같은 과다한 결점의 소유자를 청와대로 이끌었다. 그런데, 지들이 판 다 만들어놓고, 온갖 개판을 다 쳐놓고, 이제 와서 20대들에게 기껏 한다는 소리가, “너희는 희망이 없다?”

 

하지만 20대들은 쉽사리 굴복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책에 등장하는 용감무쌍한 젊은이들부터 세상에 맞짱 뜨는 모습이 심상치 않다. 그리고 이러한 ‘유뇌아’들이 결코 적지 않음을 알고 있다. 드러나지 않았을 뿐, 지금 20대들은 정말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고, 고민하고 있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걱정일 정도다. 그러니 쓸데없이 훈계하는 것보다는 이들이 보다 원만하게 고민할 수 있도록, 보다 깔끔하게 고뇌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그나마 세상을 이따위로 만든 기성세대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동혁이 형처럼 등록금이나 고속도로 통행료라도 깎아달라고 떠들어야 하는 것 아니냔 말이다.

 

범상치 않은 ‘글빨’의 소유자 한윤형, 장기하와 얼굴들이 소속되어 있는 붕가붕가레코드 곰사장, 한승수 총리를 ‘훈계’하고 이명박과 같은 학교임이 쪽팔리다고 일갈한 ‘고대녀’김지윤, ‘철학오타쿠’박가분, 살벌한 소설을 쓰는 그러나 결코 살벌하지만은 않은 소설가 김사과, 독립패션잡지 《크래커》의 편집장 장석종, 인문학의 보편화와 생활화를 꿈꾸는 부산 인디고서원의 팀장 박용준, 길거리 공연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좋아서 하는 밴드’, 20대들의 고민을 솔직하게 담은 다큐 《개청춘》의 여성영상집단 ‘반이다’까지.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는 흥미롭기 그지없다. 그리고 이들이 고민하고 있는 것, 꿈꾸고 있는 것들이 새삼 가열차게 다가온다. 오히려 기성세대들에게 묻고 싶다. 이렇게 불리한 판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짓거리를 할 수 있냐고. 당신들은 그런 열정과 실력과 눈물이 남아있냐고.

 

개인적으로 필자 중 한 명인 전아름과 친하다. 아니 본인은 부정할 수도 있겠지만, 같이 일하고 있으니 일단은 친하다고 해둬야 한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아름 씨가 책을 위해 고민하고 힘들어하고 좌절하고 때론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모습을 적지 않게 목격한 이로서, 말해주고 싶다. 적어도 고민하고 좌절한 보람은 있게 만들었다고. 아마 알만한 놈들은 책에 공감할 것이고, 알보다 작은 것들은 꺼이꺼이 울지도 모른다고. 박수 세 번 쳐준다.

 

모든 20대 들에게 지금 분연히 떨쳐 일어나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라고 말하기엔 상황이 조금 심각하게 수상하다. 그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단계는 넘어선 듯한 모양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일단은 수긍과 인정과 반성과 양심이 동시다발적으로다가 필요하다. 기성세대들이 먼저 까놓고 ‘우리가 좀 어리바리해서 어떻게 하다 보니 요 모양 요 꼴이 됐다. 베리 쏘리다. 그런데 설마 우리가 다 말아먹고 싶었겠냐. 그러니 짜증나고 밉더라도 일단은 머리를 살포시 맞대고 같이 궁리해보자’고 해야 한다. 인간적으로, 여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다음에 훈계를 하던가, 지랄을 하던가 해야 한다. 안 그러면 지난 10년에 대한 반성과 성찰 없이 무조건 이명박 반대만을 외치면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몰지각한 진보 진영과 다름이 없다.

 

책은 재미있다. 읽기에도 무리가 없고, 웃기에도 무리가 없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넘어가기엔 상당한 무리가 있다. 생각 없다고 규정지어버린 20대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정작 기성세대가 생각이 없었음이 기냥 드러난다. 때문에 조금은 쪽팔리다. 하지만 할 수 없다. 이왕 팔릴 쪽, 먼저가 낫다.

 

책을 읽으며 느낀다. 아 빌어먹을, 나도 기성세대에 들어가는 건가. 뭐 20대는 아니니 말이다. 살짝 억울하기도 하고, “얘들아, 난 니들이 알고 있는 꼰대가 아니야”라고 항변하고 싶지만, 어느 새 나이는 드셨고, 생각도 많이 굳어진 스스로를 느낀다. 다시 한 번 빌어먹을이다.

 

하지만 응원한다. 뭐가 되더라도 일단 한다는 게 멋진 것이다. 20대는 죽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20대들이 생각 없다고 떠드는 인간들에게 말하고 싶다. 4·19때, 5·18때, 6·10때 단결 단합으로 권력과 싸웠던 대학생, 20대들이 총 몇 십만 몇 천 몇 백 몇 십 몇 명이었니? 그때 모인 젊은이들이 당시 젊은이들의 다수였다고 자신할 수 있니? 유신 때, 전두환 때 도서관에 짱박혀 고시공부하고 있던 대학생들이 많았니, 나가서 화염병 날리던 아해들이 많았니?

 

미선이·효순이 때 촛불을 들고 나간 많은 이들 중 20대는 얼마나 되었을까. 탄핵 때, 그리고 쇠고기 정국, 촛불정국 때 슬며시 합세했던 20대들은 얼마나 되었을까. 단지 예전처럼 총학의 깃발, 과 깃발이 없었을 뿐이지. 그들은 언제나 함께 있었다. 그걸 왜 기억 못하니. 교복입은 어여쁜 10대 아해들이야 워낙 눈에 잘 띄니까 그렇지, 20대들도 적지 않았다고. 이들은 학점에 생명 걸어야 하고 스펙에 명운을 걸어야 하는 이들이란 말이다. 그럼에도 나갔다고! 기억 안해? 죽을래?

 

어찌하다보니 기성세대 군에 어정쩡하게 끼어버린 나지만, 책을 읽으며 유쾌했고, 소름이 돋았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분명 88만원 세대는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이 88만원에 굴복하리란 어처구니없는 생각은 아예 안 하는 게 좋을 듯하다. 이들은 지금도 진화 중이고, 아직 그 끝을 알 수 없다. 감히 상상하지 마라. 그 이상을 보고 한껏 쫄고 말테니.

 

이들의 발칙한 반란을 힘껏 응원하며, 나 역시 무뇌아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한 번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 놔. 역시나 세상은 엿 같지만, 그래도 젊은 너희들이 있어 다행이다. 건강하고!(주로 남) 아름답게!(주로 여)만 자라다오.

 

항상 베리 땡큐다!

 

(글 중 비속어 비스무리한 단어나 속어, 은어 등이 있더라도 하해와 같은 양해 바란다. 하지만 So What?)



 
 
 
세계화의 원근법 - 새로운 공공공간을 찾아서, 이산의 책 28 이산의 책 28 
강상중.요시미 슌야 지음, 김경원.임성모 옮김 / 이산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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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일본이 우리의 롤 모델, 혹은 벤치마킹 대상이 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대다수 국민적 정서에 편승해 가끔씩 일본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기는 하지만, 사실 우리는 일본을 따라가야 할 극복의 대상, 경쟁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때문에 서울에서 오래 산 이들이 도쿄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그다지 다양하지 못하다. 조금 더 세련되어 보이는 서울, 조금 더 깨끗해 보이는 서울에 다름 아니다. 사실 그것마저 근거가 불명확한 변형된 옥시덴탈리즘이긴 하다. 사실 도쿄도 그리 깨끗한 도시는 아니다.

 

전쟁 직후 우리는 잿더미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고, 오랫동안 우리를 지배했던 일본 문화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주로 문화적, 정서적 차원의 쇼였을 뿐, 사실 우리는 일본과 같아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우리의 근대화, 현대화의 역사는 미국화, 일본화의 그것에 다름 아니었다. 아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교과서에는 온통 미국에 대한 것만 있었을 뿐 아프리카나 남미는 단 몇 줄에 지나지 않았다.

 

학문 체계 역시 일본과 독일 및 영국 나아가 미국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인문학과 철학은 일본의 시각으로 들여온 서구 세계의 그것이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이들의 노력으로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왔지만, 여전히 주류의 뿌리 깊은 습성은 벗어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때문에 가끔씩 오버하는 일본 학자들을 보게 된다. 자신들의 경험에 비추어 한국의 미래를 예측하거나 아예 규정시켜버리는 이들이다. 그리고 더 우스운 것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우리 학계의 풍토다. 물론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본 학자 몇몇의 시시껄렁한 잡설을 이외로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코미디다.

 

이는 그동안 우리가 일본에 대해 가져왔던 복잡한 감정에 대한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는 일본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해 온 경향이 있다. ‘일본 보다 몇 년 뒤진 셈’‘일본의 속도에 비해 몇 배 빠르다’ 등등 일본의 성장속도, 혹은 후퇴 속도를 기준으로 우리를 평가해왔다. 양 국가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배경과 시스템의 차이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순 무식하게 일본과 비교해 스스로를 평가해 온 측면이 있다.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일본의 세계화, 그리고 우리

 

책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강상중 교수와 일본 신진학자 요시미 순야의 공동 연구서이다. 연구서라 하기엔 조금 다른 측면이 있지만, 현재 일본에 대한 진지한 모색을 함께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냉전 이후 전지구적 차원으로 이뤄졌던 세계화와 그로인해 파생된 갖가지 문제점, 그리고 새로이 나타난 의미 있는 변화에 대해 두 학자는 과거 이론들을 재확인하고 또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일본이라는 절대 단순화할 수 없는 국가를 중심으로 세계화와 새로운 공공공간 탄생의 가능성을 살펴보고 있다.

 

국가의 전통적 기능이 부정되는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몰아치고 있는 새로운 국가주의. 풀뿌리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함께 세계화를 바라보는 문화적·소비적 시각. 새로운 시민운동의 배경과 그 확대 가능성. 네트워크형 미디어의 세계적 보급으로 인해 나타나는 포퓰리즘 정치. 국가와 영토에서 민족과 종교로 전이되는 ‘탈정치’의 정치화. 책은 21세기 새로운 세계화의 움직임 속에 가능한 공공공간의 장을 여러 시각에서 살펴보고 있다. 읽어 내려가기 쉬운 것들은 아니지만, 또 다른 시각과 기존의 시각이 만나는 지점을 발견하는 즐거움은 적지 않다.

 

“역설적으로 요령부득인 유권자의 유동성이야말로 전후의 보수지배가 거둔 성과인 동시에 보수지배의 재편을 재촉하는 결정적인 요인이기도 했다.”

 

“국가로서의 일본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그대로 수도의 국제적 중심성과 당연히 대응해 갈 거라는 상정이 깔려 있었다.”

 

“예컨대 도시 간 경쟁이 세계 규모로 전개되고 있다는 인식 아래, 도쿄에 고도 정보통신기지를 탄생시키고 역외시장이나 컨벤션 시설을 정비하고 국제적 비즈니스 센터를 건설하자는 논의가 그랬고, 도쿄는 지방에 대해 국제화의 선행 모델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의도 그랬다.”

 

현재 우리 정치의 모습, 그리고 현재 서울의 모습과 비교하며 읽은 구절들이다. 앞서 우리가 여러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모든 것을 비교하는 습성이 있다고 말했는데, 또한 일본을 모방하려는 지금까지의 노력을 언급했는데, 위 문장들은 일본의 노력과 그 뒤 우리의 행태를 비교하게 만들어준다.

 

‘탈정치화’된 정치, 그 이후는?

 

책은 20세기 공간에서의 아메리카주의를 설명하며 시작한다. 그리고 세계화에 대한 여러 정의들을 살펴보고, 새롭게 생성되고 소멸되는 공공공간의 다양한 차원의 모습을 돌아본다. 그 후 일본이라는 국가를 대상으로 국가의 퇴장 뒤에 나타난 새로운 ‘국가 과잉’을 분석한다.

 

경제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시도한 일본의 ‘일본형 복지사회’구상의 좌절. 그 안에서 새로 나타난 내셔널리즘의 강화, 이시하라 신타로를 통해 바라본 ‘세계도시 도쿄’의 모순, 도쿄라는 도시 안에서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민족적 네트워크, 자본과 정보의 월경적 네트워크. 이런 모습은 자연스럽게 지금의 서울, 나아가 한국을 바라보게 만든다. 세계 디자인 도시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소모적인 사업을 펼쳐온 서울, 그 안에서 재개발이란 이름으로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나가도 상관없다는 식의 발상. 디자인이라는 무형의 복지를 위해 소외계층에 대한 지원이라는 유형의 복지를 축소시키는 모습. 이는 결국 보여주기 위한 서울을 위해 정작 서울에 살고 있는 이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모습이다.

 

이어 책은 국민적 미디어의 내러티브, 즉 텔레비전이 일본 국민들에게 끼친 영향력을 분석하고, 가전제품의 등장(3종의 신기)이 일본 내셔널리즘 형성에 어떤 작용을 하였는지 설명한다. 천황가의 일본열도 지배자 자격을 정통화하는 상징이었던 3종의 신기가 가정에 비치된 고가의 가전제품들로 대치된 과정은 국가적 상징이 국민의 사적인 영역으로 분열되어 가는 모습을 상징한다. 이는 일본의 미국적 생활방식 도입, 그리고 민주화에도 직결된다.

 

이는 1980년대 들어 미디어의 탈장소화에 따라 급격히 흔들리게 된다. 전 세계적인 미디어의 변동 속에 일본의 변화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본이라는 사회적 동시성을 약화시켰다는 점에서는 주의가 필요하다. 이는 우리에게도 적용 가능하다. 온 가족의 대화를 차단시켰던 텔레비전은 이제 아예 개인 휴대폰과 각종 휴대기기로 인해 더욱 파편화되어 가고 있다. 전자기기의 발달이 가져온 사회적 동시성의 약화는 가족이나 지역사회가 키워온 공동체적인 시간을 해체시켰을 뿐 아니라, 근대국가가 만들어 놓은 국민적 시각도 그 내실을 분해시키는 작용을 했다. 더군다나 이젠 그야말로 미디어 작용에 대해 각 개인의 신체가 무방비로 노출되어버린 시대에 접어들었다. 가족, 공공성이라는 완충지대가 사라진 것이다.

 

일본 주류 미디어의 역사 왜곡, 시장화 나아가 내셔널리즘과의 협력 문제도 책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정신대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주류 언론이 보여준 이해하기 힘든 방관, 혹은 축소 모습. 그들의 침묵이 의미하는 것은 미디어의 외형적 성장에 따라가지 못하는 그들의 인식 체계를 보여준다. 또한 일본 내부에서 커지고 있는 내셔널리즘에 대한 언론의 동조 혹은 협조관계 구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사실 고이즈미, 아베 등 보수 정치인들이 언론을 이용하여 정치적 자산을 쌓아온 사례를 샐 수 없을 정도다.

 

일본 언론의 보수화는 전지구적인 시장화나 미디어의 다극화·세분화가 반드시 가치의 다원화나 혼성화와 결부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훨씬 자주 내셔널리즘적인 이데올로기의 돌출을 초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미 오랜 전부터 보수일색의 언론이 주류 언론을 장악해왔던 한국의 경우에서 세계화와 언론의 만남은 일본 못지않은 내셔널리즘을 생산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각종 국제 스포츠 경기 때마다 나타나는 천박한 내셔널리즘의 표출은 국민적 정서를 교묘히 이용하는 상업적, 이데올로기적 비즈니스에 다름 아니다. 물론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거기에 특정 종교에 대한 찬미까지 덧붙여져 더 다양한 화려함을 나타내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책은 기존의 국민적 미디어가 동요하는 가운데 국민적 내러티브는 다시 강화되면서도 그 밑바탕에서는 무수한 분열이 잉태되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공공성의 동요, 지금까지 한편으로는 국가나 행정 시스템으로, 또 한편으로는 국민적 미디어인 공공방송이나 전국지로 대표되었던 공공성이 분열하고 유동화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탈장소화하고 비동시화하며 자기편집성을 확대시키는 1980년대 이후의 각종 미디어는 이런 상황의 원인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미디어의 작용을 그들 자신의 일상적인 실천능력 쪽으로 탈환할 경우에는 새로운 공공성의 장을 형성해 가기 위한 조건이 되기도 한다.”

 

우리 역시 이러한 경험을 촛불정국을 통해 절실히 느낀 바 있다. 누가 기자고 누가 시민이랄 것도 없이, 무수히 많은 ‘시각’이 현장을 실시간으로 중계함으로서 보다 많은 동력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힘은 국가적 미디어의 분열 이후 새롭게 나타난 공공의 장이었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비쳐진 것이 사실이다.

 

다원적인 공공성의 가능성 ‘디아스포라’

 

일본형 경제시스템이 붕괴된 이후 이를 뒷받침했던 중간적 공동체가 몰락하는 가운데, 일본의 신우익 내셔널리즘의 부상은 공공공간의 규율을 관철시킬 국가의 재생이 마지막 버팀목이 되고 있는 상황과 관련이 있다. 책은 문화의 핵분열을 촉진하는 세계화에는 특정한 장소와 결합된 문화의 동일성을 허물고 집합적인 기억의 망각을 추진해 나가는 힘이 작동한다며, 따라서 국민적 정체성의 재생을 위해서는 국민의 집합적 기억으로서 역사를 새롭게 발견하거나 날조해내는 일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한다. 이른 바 ‘기억의 내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역사만들기에 한창인 현 이명박 정부의 행태를 봐도 알 수 있다. 느닷없이 건국절을 들고 나오는 그들의 의도는 결국 과거와의 단절과 기억의 날조에 다름 아니다.

 

일본의 세계화를 논함에 있어 재일동포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이들 코리안 디아스포라 문제는 그동안 일본이 애써 외면해온 문제이기에, 또한 우리의 무관심과 외면 속에 만들어진 문제도 함께 있기에 더욱 중요하다. 책은 디아스포라적인 공간이 전지구적으로 이산하면서도 어떤 혼성적인 공동성을 계속 지향하는 이중성을 띠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이중성 속에 디아스포라적인 공간의 포착 곤란성과 가능성이 공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코 단순히 본질주의적인 민족공동체로 회귀하지도 않을 것이고, 전지구적인 무경계화로 해소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경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새로운 항쟁적 자장을 이중삼중으로 만들어 갈 것이며 ‘민족’이나 ‘국민’은 그런 자장에서 증식해 가는 이산적인 네트워크에 내파되어 갈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경계, 정체성의 매개적이고 항쟁적인 장 속에서 국민국가적 공공공간으로 회수되지 않는, 보다 혼성적인 공공공간의 부상을 읽어내고자 한다.”

 

책은 마지막으로 일본 속의 미국 ‘오키나와’에 주목한다. 오키나와에 미군기지 이전을 두고 벌어진 갈등을 통해 나타난 다양한 공공공간의 발생 가능성을 살펴본 것이다. 미일 동맹과 경제적 이익 등을 계산한 중앙정부의 이전 추진과 생명공동체, 문화적 다양성 과정을 통해 형성된 오키나와 특유의 역동성으로 대표되는 시민차원의 움직임. 이는 정체성의 복합적인 뉘앙스로 나타나고 공공공간의 현재와, 당위적인 미래를 역으로 보여준다.

 

오키나와는 우리의 용산과 겹쳐진다. 물론 역사적 맥락이나 상징성에 있어 오키나와와 용산은 같을 수 없다. 하지만 수도의 한 복판에서 100년이 넘도록 주둔해왔던 용산의 미군이나, 본토의 번영을 위해 ‘말뚝’역할을 해 온 오키나와가 전혀 틀리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아울러 미군 기지의 철수 이후 개발주의에 포위되었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오키나와는 이태원, 동두천과 같은 문화적 정체성 문제도 포함한다. 오키나와다운 음악이 주목을 받던 시기에도 이미 오키나와 음악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었고, 그 이전 미군 문화에서 파생된 다양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본토로 귀환된 오키나와는 ‘오키나와’적인 음악이 아닌 그냥 ‘공통적인 매력’을 가진 도쿄 중심 음악에 편입되어 버린 모습이다. 하지만 책이 주목하는 것은 오키나와가 ‘야마토 세상’과 ‘미국 세상’의 틈바구니에서 그저 농락당해 오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만만치 않은 저항을 거듭하는 동시에 ‘기지 문화’와 월경적으로 확대되는 이동의 네트워크, 미디어의 유통 시스템 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찬푸루 문화’(두부와 야채를 지져 만든 오키나와의 대표적 전통요리)라고 하는 혼성적인 ‘색다른 풍속의 문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이는 오키나와라는 장소의 역학이 정체성의 복합성과 결합되어, 새로운 전지구적/지방적 공공공간을 부상시켜 왔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바람직한 공공공간은 무엇인가

 

말이 많았다.

책은 세계화를 이야기할 때 정치·경제적 측면과 문화·사회적 측면을 단절시킨 채 이뤄질 수 없다는 전제 하에 ‘세계화 속의 권력재편’을 정치의 공간, 도시의 공간, 미디어의 공간, 민족적인 네트워크의 공간으로 나누고 이러한 여러 공간들이 뒤엉켜 싸우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탈정치의 ‘정치화’가 이뤄진 지금 새로운 공공공간의 바람직한 상태는 무엇인가 모색한다. 일본의 세계화 과정, 혹은 경계의 혼용과정을 통해 보편적 세계화가 가능한지, 혹은 세계화 자체의 규정이 가능한지 고민했다. 이 책을 현대일본사회론으로 볼 수도 있는 이유다. 짧은 식견으로 이 책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하기엔 부족하다. 다만 세계화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혀 주었다는 점과 일본 사회에 무지한 나에게 조금이나마 일본을 이해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고마운 책이라 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새로운 공공공간은 타자의 시선을 아우를 수 있는, 또한 계층과 인종, 젠더와 역사를 뛰어넘는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게 결국 나의 결론!

 



 
 
 
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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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쿠, 잊고 있었다. 진중권이 미학자였다는 사실을. 이 시대의 지식인이자 진보논객으로 때론 날카롭게, 때론 씁쓸한 웃음을 자아내게 세상을 씹어댔던 그가 사실은 예술을 사랑하는 감성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언제나 공부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미학자로서 좋은 책을 내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목표라 말해 온 그에게 조금은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어쩌랴, 세상은 미학자 진중권 보다는 논객 진중권을 원하고 있음을. 살짝 정신을 놓아버린 세상에 그의 자칫 거북스러울 수도 있는 비판과 날선 글들은 그를 더욱 치열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우린 호불호를 떠나 그에게 많은 것을 얻었고, 또 기대하고 있다.

 

때문에 이번 책은 조금은 긴장을 풀고 읽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 재미에 빠져버렸다. 12점의 그림을 자기만의 시각으로 해석하며 진중권은 자신의 내면을 함께 풀어냈다. 획일적으로 규정지어버린 정의를 전복시키는 시각은 역시나 그가 진중권임을 확인시켜주지만, 반대로 그동안 모든 예술을 타인의 시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를 강요했던 시스템에 대한 새삼스러운 촌스러움도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작품의 수용은 그저 작품이 던지는 물음에 답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그의 지적에 동감한다. 진정한 의미의 감상은 작품을 통해 누구도 던지지 않았던 새로운 물음들을 생성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공감한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소리 아닌가. 내가 보기엔 정말 말도 안 되게 형편없다고 느낀 미술 작품이 실은 수억 원대를 호가하는 예술작품이었음을 알았을 때의 그 유쾌한 당혹감. 쏠쏠한 재미다. 그 작품은 적어도 내겐 쓰레기 아닌가. 결국 중요한 것은 그의 말처럼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보다 문제를 ‘제기’하는 능력, 의제를 처음으로 ‘설정’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미술을 떠나 음악이든 소설이든, 거의 모든 예술 분야에 있어 권위자, 혹은 해석의 선점자가 내놓은 규정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져왔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의 초중고, 나아가 대학 시절을 떠올려 보라. 아니 대입시험을 기억해보라. 어떤 작품에 대한 절대적 해석. 그 해석만을 믿고 암기해야 했던, 결과적으로 예술에 대한 이유 없는 거부감을 일으키게 만들었던 시간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우린 정해진 해석만을 강요당해왔다. 그리고 물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진중권의 ‘푼크툼’이 새로울 것이 전혀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동안 모든 것을 ‘스투디움’의 틀에 따라 해석해오지 않았나. 생각해보니 비단 예술 분야만은 아니었다. 사회가 규정해놓은 수많은 스투디움이 우리를 규정하고 또한 도망칠 수 없게 묶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미술 작품에 창피할 정도로 무지한 입장에서 진중권이 풀어놓는 그림들의 향연은 눈부시다. 그리고 그의 해석이 때론 신선하게 때론 당연한 듯 받아들여진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푼크툼에 매몰될 수는 없다. 나 역시 나만의 푼크툼으로 그림을 바라볼 뿐이다.

 

유쾌한 책읽기의 과정에서 그리 유쾌하지 못한 사회를 바라보게 된다. 규정된 틀 안에서 깨어나기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그 고통을 타인에게 전가한 채 그 이후의 과실만을 공유하려 하는 기생적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기실 우리는 기생으로 살아온 것은 아닐까. 스스로 물어보게 된다.

 

종교와 신화와 자본과 욕망. 주술과 과학이 교접해 만들어진 수많은 예술작품 앞에서 인간의 고뇌와 욕망이 함께 날 것으로 드러난다. 그 과정은 인간이 이성을 만들어가는 시간이자 어두움과 고별하는 의식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또 다른 스투디움이 아닌지 갸웃거려진다. 인간의 진보는 절대적 사실인가. 인류의 역사가 과연 진보를 향한 더딘 발걸음 이었을까.

 

수많은 예술가들이 명멸하며 만들어낸 작품들은 모두가 작가의 고뇌와 열정이 담겨있을 것이고, 또한 시대가 녹아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내지 못한 시간들을 작품을 통해 느끼고 공유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해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또 다른 푼크툼과 스투디움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작품과의 고독하고 내밀한 만남. 아직 미술을 통해 느껴보지는 못했지만, 어설프게나마 문학과 음악을 통해 경험한 바 있다. 이 책을 통해 이젠 감히 미술에도 주제 넘는 호기심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아니 애초부터 중요한 것이란 결국 없는지도 모른다. 시공을 초월한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실은 순전히 사기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만 이 시간에 살고 있을 뿐이고, 지금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진중권이 이끌어준 다양한 해석의 향연. 충분히 유쾌했고 의미 있었다. 이젠 중요한 그것이 무엇일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삶에서 예술에서 지금 나에게 다가오는 심연은 무엇인지, 한 줄기 희미한 불빛은 무엇인지. 현미경까지는 안 되더라도 슬며시 돋보기를 집어들어야겠다.

 

어설픈 푼크툼이면 어쩌랴. 적어도 판에 박힌 식상함보다야 낫지 않을까.

 



 
 
 



 



 



 



 



 



 



 



 

이 중 오세훈의 조용한 혁명은 심히 읽기 싫지만, 그래도 보내준 출판사의 성의를 봐서 한 번을 읽을 생각. 그러나 서평이 그리 아름답지는 않을 듯.